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관 Mar 26. 2020

독특한 그림체, 뻔한 스토리

영화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보고 쓰다.

문득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의 욕심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영향인지. 확실한 것은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와는 달리 많은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결론을 내리면 그다음 선택지는 둘로 나누어진다. 행복을 과거에서 다시 찾을지, 아니면 현실에 만족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행복을 만들어가야 할지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인 가구야 공주처럼 마지막까지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정하지 못한 채 떠나 버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와 같지 않으므로 선택을 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고 뒤늦게 후회하기엔, 이미 너무 늦을 테니 말이다.



그녀는 대나무 죽순에서 태어난다. 이런 탄생의 신비는 마치 우리나라의 설화와도 비슷하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과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런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비범함은 가구야 공주에게도 느껴진다. 그녀는 마치 대나무가 자라는 속도처럼 빠르게 커나가면서 시골의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추억을 쌓는다. 아무런 걱정거리 없이 산과 들을 뛰어다니는 가구야는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구야를 처음 발견한 할아버지는 그녀를 자신의 딸로 삼고 정성껏 돌본다. 그녀가 자신에게 온 것은 모두 하늘의 뜻이라 믿고 있던 그는, 어느 날 자신이 베던 대나무에서 수많은 황금을 발견한 이래로 가구야를 정말 귀한 '히메 사마'로 만들어 진짜 공주가 되도록 하는 것이 또 다른 하늘의 계시라고 믿어버린다. 그 믿음의 결과는 그의 가족들이 살던 곳을 떠나 도성의 새로운 저택에 살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 저택에서 가구야 공주는 이름을 하사 받고, 귀족이라면 알아야 할 각종 예의와 지식을 공부하며 지루한 나날을 보낸다. 그녀의 지성과 미모는 곧 귀족들에게까지 퍼지고, 그들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저택으로 모인다.



그 자리에서 5명의 귀족들은 각자 미션을 받는다. 가구야 공주가 얼마나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지,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물건들처럼 귀한지 설명한다. 그리고 역으로 공주는 그 물건들을 가져온다면 청혼을 승낙하겠다고 말한다. 당연히 그들은 모두 실패한다. 마지막 순서의 남자가 물건의 의미를 말하며 가구야를 설득하긴 했지만, 그의 진심과 과거가 그녀의 꾀 덕분에 탄로 나며 결국 모두가 되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 과정 중에 한 명이 물건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어버리고 말아서, 그녀는 회의감에 휩싸이게 된다.


나중엔 심지어 황제까지 그녀를 포기한다.


애초에 저택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은 다 그녀를 처음 데리고 온 할아버지의 욕심 때문이었다. 황금을 팔아 도성 안에 집을 마련했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하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간이 지나고 여러 귀족들과 황제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자, 그는 자신의 욕심을 드러낸다. 하지만 가구야 공주는 전생의 기억을 되찾은 이후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지상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결국 그녀는 다시 자신이 살던 대나무 숲 마을로 돌아간다.



그리고 거기서 오래전 자신과 함께 놀던 동네 친구 스테마루 오빠를 만난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그는 자신의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었던 상태였다. 둘은 마지막 비행을 시작한다. 마치 그동안 저택에 갇혀있으면서 마음속에 응어리져있던 모든 한을 하늘로 날려 보내듯, 가구야 공주와 스테마루는 하늘을 날며 행복해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꿈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잠에서 깬 스테마루는 마치 환상이라도 본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다시 아내에게로 향한다. 그 이후의 가구야 공주는 모두가 아는 대로 하늘의 부름을 받아 다시 돌아가 버린다.



만약 그녀가 도성으로 떠나지 않고 시골에서 살았다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불교의 설화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인간의 세상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마치 하룻밤의 꿈과 같이 허무한 것이라는 교훈을 주는 우리나라의 어느 설화처럼, 가구야 공주 이야기도 마찬가지로 인간사의 모든 고통과 쾌락은 그저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저 인간에 불과하므로, 이 세상에 머무르는 동안은 최선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할 것이다. 가구야는 아버지의 뜻으로 원치 않는 이사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항상 예전에 살던 대나무 숲의 집을 그리워해서 저택 뒷마당에 비슷한 모형을 만들었지만, 결국 모든 것이 헛수고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게 되었다. 그나마 저택을 뛰쳐나가 스테마루를 만나게 된 것은 답답한 그녀의 상황을 지켜보는 우리에게도, 당사자에게도 마지막 해방감 같은 것을 안겨주긴 했다. 그래도 일말의 찝찝함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시대적인 이유로, 또 개인의 욕심 때문 한 인간의 삶을 불행해지는 모습을 보는 일은 언제나 안타깝다.



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더해 주는 것은 다른 이유들을 더 들어볼까. 아무래도 작화가 다른 지브리 작품들에 비해서 선이 더 거친 느낌이 들었다. 영화 초반에 가구야 공주가 태어나서 성장할 때까지의 장면들과 시골로 도망쳤을 때의 장면들은 한지에 색이 고운 물감으로 붓질을 한 그림들 같다가도, 나중에 영화 후반에서 가구야 공주의 혼란스러움을 표현할 때는 거친 연필의 선이 인물의 감정을 잘 살려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과하지 않은 색감의 표현이나, 지브리 특유의 파스텔 톤에서 벗어난 새로운 색깔들을 영화 내내 즐길 수 있었다는 점도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는 요소였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새로운 도전이 반가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상대방을 위한 배려가 중요한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