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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관 Mar 09. 2020

수많은 이름의 타자성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고 쓰다

요새 지브리 시리즈만 계속 봐서 다른 영화를 볼 시간이 없었다. 볼 만한 영화들이 없었기도 했지만, 그것보단 익숙한 것을 다시 보는 게 더 좋았기 때문이다. 내가 본 대부분의 지브리 애니들은 거의 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것들이었다. 그는 자기가 만든 영화마다 하나의 시선을 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은 언제나 작지만 구체적인 메시지와 시대의 역사, 그리고 감독의 판타지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노노케 히메'의 사슴신과 대자연의 법칙이 그러했고, '천공의 성 라퓨타'의 하늘을 떠다니는 고대 성과 과학기술이라는 주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대표적인 영화들을 살펴보면 더 나오겠지만, 결국 영화에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순수와 성장', 그리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사유'이다. 너무 일반화시킨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에 대해 고민했고,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는 고도로 발전된 과학기술이 과연 인간의 삶과 미래에 어떤 식으로 이득이 되는지에 대해서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또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는 새로운 마을에서 살아가게 된 마녀 키키가 좌충우돌하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깨닫게 돼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고, '이웃집 토토로'에서는 티 없이 맑은 아이들의 동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메시지들은 판타지의 시선으로 현실 세계의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돼지로 변해버린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귀신들의 목욕탕에서 일하는 센의 고군분투를 그린 영화다. 인간 세계의 이름인 '센'에서 귀신 세계의 이름인 '치히로'로 고치고 살아가기 시작한 그녀는 목욕탕에서 일하면서 각종 난관을 헤쳐나간다. 가마 할아범과 하쿠의 도움으로 유바바의 위협에서 벗어나 목숨을 지키게 되고, 가오나시의 도움으로 더러워진 강의 신을 무사히 돌려보내고, 욕심으로 커져버린 가오나시의 폭주를 저지한다. 그런 어려움을 잘 보낸 치히로는 마침내 그곳에서 탈출한다. 또 가오나시는 제니바의 집에서 일을 도우며 살게 되고, 하쿠는 자신의 이름을 다시 기억해낸다. 전형적인 해피엔딩이다.



이런 줄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케이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신이 목욕하러 온천을 찾는 것과 용으로 변해 날아다니는 하쿠의 모습은 판타지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요소라고 볼 수 있다. 또 그 비현실적인 세계 속에서 이뤄지는 주인공의 성장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성장'이라는 키워드에서 우리는 영화를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한다. 센과 치히로, 그리고 다시 센으로 돌아가는 여정 속에서 그녀는 진짜 '성장'했을까? 애초부터 센은 그런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자신도 모른 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 의문에 대한 근거는 센이 부모님의 손을 잡고 온천마을에서 나가는 마지막 장면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부모님과 함께 나가는 모습은 센이 마치 치히로였을 적에 겪었던 일과 비교해보면 나약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제니바의 머리끈을 묶은 센은 여전히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귀신 온천에서의 일로 인해 앞으로도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암시한다.



영화는 정체성에 대한 시사점도 제공한다. 이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센은 치히로라는 이름으로 유바바의 온천에서 일하지만, 하쿠의 도움으로 다른 종업원과는 달리 자신의 이름을 잊지 않는다. 보통은 마법의 영향으로 자신이 어떤 이름을 가졌는지, 과거에 무슨 일을 겪고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까먹게 된다고 한다. 때문에 하쿠 역시 자신의 이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센의 기억 덕분에 겨우 기억을 되찾게 된다. 나는 '자신이 점점 누구인지 까먹게 되는 설정'이 어쩌면 당시 일본의 상황과 맞물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블 경제로 모든 것이 무너지는 일본 사회 속에서, 개인은 더 이상 개인으로 남아있기 힘들겠다는 상상을 했기 때문이다. 고도로 성장한 경제 상황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빛나는 시대를 상징했던 건물들은 모두 빛바랬을 때 문득 스스로를 돌아봤던 그 당시의 사람들은 얼마나 허무했을까. 그 시간을 헤쳐온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내가 누구였는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까먹었을 것이다. 마치 하쿠와 온천의 종업원들처럼 말이다. 그래서 영화는 기억을 잃은 관객들을 위로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진짜 내 모습은 뭔지, 나를 부르는 수많은 이름들 사이에서 진짜 내 이름은 무엇인지 찾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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