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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관 Mar 08. 2020

그 누구의 편도 아니었던 절대자

영화 '모노노케 히메'를 보고 쓰다

'대자연'이라는 단어의 존재는 한때 인간이 자연을 향한 경외심을 품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 단어는 그저 단순한 동물이나 식물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강력한 규칙을 의미한다. 비록 인간은 규칙을 조금씩 어기면서 자신들의 세를 넓혔지만, 그 와중에도 몇몇은 자신의 종족이 결국 법칙을 거스를 수 없는 동물 중 하나라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 영화는 그 사실을 인식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에게서 시작한 작품이다. '인간과 자연은 영원히 공존할 수 없는가', '그 사이에서 선악은 과연 누구의 몫인가'라는 의문으로 시작된 영화는, 마지막 장면까지 목을 절대 놔주지 않는 늑대처럼 우리의 숨을 조여 간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원한으로 재앙 신이 들린 커다란 멧돼지를 죽인 아시타카는 치명적인 죽음의 저주에 걸린다. 저주를 풀 방법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떠돌던 중, 그는 사슴 신을 만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길을 떠난다. 그러다 여인들이 철을 만드는 타타라 마을에 도착한 그는, 마을의 수장인 에보시 고젠을 만난다. 그녀는 사슴 신과 숲의 고대 동물들을 모두 죽이고 그 영역을 차지할 심산으로 총을 만들고 있었다. 한편, 타타라 마을의 무기를 경계하는 숲의 들개 무리와 원령공주 '산'은, 멀리서 온 멧돼지 일족과 함께 인간과의 전쟁을 준비한다. 그 와중에 수도에서 파견된 밀정과 사냥꾼들은 에보시를 도와 사슴 신의 목을 노리는 상황이었다. 인간은 영역의 확장과 신의 목을 위해, 동물들은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싸우려 하고 있었다.


숲의 모든 원령들이 섬기는 사슴신. 그는 아시타카를 살려주지만 재앙신의 저주를 풀어주지는 않았다.


이 영화에서 사슴 신은 절대자 그 자체이다. 총에 맞은 죽음 직전의 아시타카를 살려주고, 그가 데려온 타타라 마을의 부상자들까지 회복시켜준다. 숲의 모든 원령들을 보살펴주고, 인간들에게 신이라고 불리는 숲의 고대 동물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그의 목을 따겠다? 나는 에보시와 사냥꾼들의 목표가 가소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정말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조정의 명령을 받은 밀정과 사냥꾼들은 기어이 사슴 신의 목을 얻는 데 성공하고야 만다. 그런데 그 이후의 상황은 아포칼립스 그 자체이다. 사슴 신의 발걸음마다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 그의 능력은, 그의 목이 날아가자마자 죽음 그 자체로 변모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사방으로 뻗어나가서 인간을 비롯한 숲의 모든 생명체들을 없애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목을 찾아 헤매기 시작하는 사슴신은 모든 것을 박살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숲과 타타라 마을을 모두 박살 내버릴 것 같던 사슴 신은, 아시타카와 산의 노력으로 머리를 되찾는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파괴했던 모든 곳에 다시 파란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누구는 이 이야기의 모든 원인이 바로 인간의 욕심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시타카가 재앙 신의 죽음의 저주를 받은 것은 그가 잡은 재앙 신이 지금의 타타라 마을 주민들과 멧돼지 신의 영역 다툼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또 사철을 끌어모아 마을의 영역을 넓히려는 에보시의 욕심도 이런 재앙에 한몫을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 덕분에 남녀가 차별받지 않고 심지어 나환자들도 사회적 일원으로서 일하는 이상적인 타타라 마을이 만들어졌다. 어쩌면 인간의 복지를 위해서 숲을 개발하려는 사람들과,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려는 들개와 멧돼지들의 적대적 행동은 필연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그저 종족의 생존을 위해 투쟁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영화 속 사슴 신의 죽음은 인간을 위해서도, 자연을 위한 죽음이라고 해석돼서는 안 된다. 그는 에보시와 조정의 사냥꾼들이 목을 자르기 전까지도 그들에게 위해를 가한 적이 없었다. 또 멧돼지들의 대장인 '옷코토누시'가 사슴 신의 숲에 찾아가서 애원해도 그는 듣지 않고, 다만 대장의 목숨을 조용히 거둘 뿐이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이 사슴 신은 발을 내딫을 때마다 새 생명이 돋아나고, 또 죽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인간과 자연 중 그 어느 쪽의 편도 아니고, 그저 죽음과 생명을 다루는 일만 할 뿐이다. 이런 영화 속의 사슴 신은 대자연의 법칙을 상징한다. 자연의 룰은 누구의 손을 먼저 들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재앙 이후의 상황을 앞으로 어떻게 해결할까? 답은 바로 원령공주 '산'에게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그녀는 들개들의 리더 '모로'의 딸이다. 비록 아주 어렸을 때부터 모로에게 발견되어 키워져서 들개 무리의 일원으로 성장했지만, 그녀는 다른 동물들로부터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인간과 자연 중 그 누구에게도 완전한 환영을 받지 못한 그녀지만, 그래도 산은 아시타카에게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겠노라 선언한다. 그녀는 그에게 '아시타카는 좋아하지만, 인간들은 용서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시타카는 마을에 남아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한다. 영화는 갑자기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해결되는 방법이 아닌, 한 걸음씩 나아가자는 식의 의지를 남기면서 끝이 났다. 이 모습을 보면서 나는 '공존이 단기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 작은 변화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느낄 수 있었다.



큰 재앙 이후에 다시 희망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가정은 옳지 않다. 사슴 신의 폭주로 타타라 마을의 주민들은 오랫동안 지켜온 제철소의 불씨를 잃었고, 자신들의 터전이 황폐화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또 숲은 모든 광채를 잃고 큰 산불이 지나간 것 마냥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그런 숲에서도 다시 새싹은 자라나고, 숲의 정령들은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타타라 마을 주민들 역시 집과 제철소를 재건하고 다시 삶의 불씨를 피울 것이라고 추측된다. 질긴 생명을 이어가는 것은 인간이나 자연의 풀들이나 똑같았다.



또 그들은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마음을 여는 법을 배울 것이다. 그것은 숲에서 살아가는 산과, 타타라 마을의 에보시와 주민들이 공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서로의 절망 속에서 그들은 앞으로도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줄지 모르지만, 그들이 이끌어낼 변화는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아니, 달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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