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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관 Apr 20. 2020

삶과 죽음을 잇는 수많은 음표들

영화 '코코'를 보고 짧게 쓰다.

인간은 사는 동안에는 모두 사형수와 같은 운명이라고 했다. 어떤 인생을 살아가든, 우리는 결국 마지막을 맞이할 것이다. 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을 떠올리게 될까.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아무래도 생명의 유한성이라는 특징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 죽고, 다시 태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니 말이다. 종교들은 사후 세계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었다. 거기서 말하는 천국, 극락 같은 사후 세계의 보장은 어쩌면 인간이 영원히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자 하는 발악 같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영화는 그런 상상력에서부터 출발한다. 주인공은 아주 우연한 기회로 망자의 세계에 건너간다. 죽은 자들의 세계는 살아생전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맛있는 것들을 먹고, 음악을 연주하고, 또 빈부격차가 존재한다. 저승에 가면 잘 살기라도 하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저승에서도 여전히 배고픈 삶을 살고 있다면 그 가족들은 얼마나 슬플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것에 포인트를 주지 않는다. 그 세계들은 모두 상상일 뿐이다. 누구나 한 번쯤 해본 상상 들일뿐이다. 주인공은 음악을 너무나 사랑해서 겨우 이승으로 돌아와도 바로 저승의 약속을 저버릴 정도다. 그러나 가족들은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다. 기타 한 번 쳐보겠다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손자의 기대를 박살 내버리지 않나, 자신의 조상에 대해서 제대로 말도 하지 않는 가족들은 음악과 여전히 담을 쌓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국 그 가족들은 음악으로 인해 다시 뭉친다. 이제는 망자가 되어버린 가족까지 그들은 다시 한자리에 모여 흥겨운 음악과 함께 다시 돌아온 망자의 날을 즐긴다. 가족들에게 아픔을 준 음악이 다시 누군가를 기억하고, 모두를 뭉치게 하는 힘을 준다는 점은 따뜻한 아이러니였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음표들이 삶과 죽음을 갈라도 이어지는 끝없는 갈등을 따뜻하게 품어주고,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꼬인 갈등의 실타래를 풀어주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관객들은 이런 장면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멀리 보내야만 했던 수많은 인연들을 떠올리며 눈물짓고, 또 추억하게 된다. 나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어, 우리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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