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향을 쓰기는 쉽다, 행동은 어렵지만.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읽고 쓰다.

by A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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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에 산 이 책을 오늘에서야 다 읽게 되었다. 사실 이것말고도 중간에 다른 책을 읽기도 했고, 시험 기간이 겹쳐서 공부하느라 독서가 늦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다 나의 변명이다. 어떻게든 읽으려 했으면 읽었겠지. 아무튼 얼마전에 시험이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다시 이 책을 펴고 읽기 시작해서 오늘 끝장을 봤다. 독일 소설은 헤르만 헤세와 '마의 산'을 읽고 난 뒤로 처음이라 특유의 만연체가 나를 괴롭히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예상보다는 읽기가 수월해서 좋았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에, 나는 아마 이 소설은 한국에 발매된 당시의 사회에 큰 파급력을 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니나 부슈만'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과정이 그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결혼을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삶을 좀 더 자유롭게 살아가고픈 보헤미안들에게는 큰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니나 부슈만 역시 그러한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래서 많은 여성 독자들은 그녀의 삶을 동경했을 것이다. 전체주의의 광풍이 유럽을 휩쓸고 다니던 그 시기에,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정치적 활동을 했고 글을 썼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니나의 개인적인 삶은 성한데가 없을 정도로 상처투성이였다. 원하지 않았던 결혼과 임신으로 그녀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는 극에 달했고, 그러한 일들의 연속은 후에 자살기도로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이 과정의 끝에서 주인공은 역설적으로 삶이 이어져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된다.



소설 속에서 니나 부슈만 만큼이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남자가 있다. 슈타인은 니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대학 교수다. 그는 니나를 처음 본 뒤로 근 20년 가까이 그녀를 향한 사랑을 이어나가다 병으로 죽는다. 재력이 있고,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그가 나치당에 부역하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니나는 슈타인의 삶에 있어서 큰 의미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니나에게 있어 슈타인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방향에 대해서 의견이 맞지 않은 사람이었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슈타인은 은연 중에 니나와의 결혼에 대한 욕망을 소유욕이라는 방식과 함께 자신의 일기 속에서 내비친다. 물론 그러한 사고에 대해서 슈타인 역시 스스로를 경계하지만, 결국 둘은 결혼이라는 방식으로 관계의 끝을 보지 못한다.



처음에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나치가 활개를 치는 유럽 속에서 글을 쓰고 정치적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나가는 그녀가 멋있다고 생각했다. 개차반 같은 인간들에게 시달리고, 나치에 부역하지 않았다고 15년형이나 선고받는 상황 속에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날 것이라며 주변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그녀의 모습은 의연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책을 쓴 작가의 자전소설이라는 설명과, 작가의 실제 삶을 비교해보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2011년에 가톨릭 사제 호세 무리요가 그녀의 장남의 도움을 받아 출간한 평전을 보면 루이제 린저의 모습은 니나 부슈만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나치에 저항하고 자신의 삶을 용감하게 살아가던 니나와 달리 루이제 린저는 유대인 학교장을 밀고하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 나치당에 가입했으며, 나치에 대한 찬양시를 썼다.



“우리 모두는 약간은 비겁하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이지.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어. 내가 그리고 싶은 게 바로 이거야. 우리는 착하면서 동시에 악하고, 영웅적이면서 비겁하고, 인색하면서 관대하다는 것. 이 모든 것이 밀접하게 서로 붙어 있다는 것. 그리고 좋고 나쁘고를 떠나 한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도록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말이야.”



책 속에서 나오는 권위와 불의에 저항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던 니나의 입을 빌려 작가는 인간과 삶에 대한 생각을 소설에 녹여두었다. 하지만 이러한 구절들은 결과적으로 작가의 삶에 대한 비겁한 변명으로 들린다. 이 소설은 역경을 딪고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이상을 그리지만, 정작 작가는 나치, 북한과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와 리더십을 찬양했다. 나는 이것이 여성주의니 뭐니하는 사상의 문제를 떠나서, 한 개인의 양심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이상을 쓸 수는 있지만, 행동은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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