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고 쓰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이 문장은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첫 문장이다. 바다는 잔잔한 파도와 함께 자신의 것을 인간과 나누기도 하지만, 때로는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한 높은 파도와 허리케인으로 자신의 속을 게워내기도 하고 손아귀에 쥐고 있던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이런 바다의 특성은 그것을 지칭하는 단어에서도 나타난다. 바다를 의미하는 스페인어인 ‘라 마르(la mar)’ 혹은 ‘엘 마르(el mar)’처럼, 스페인 사람들은 바다를 설명하기 위해 각각 여자와 남자의 이미지를 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곡식과 과일을 제공해주는 대지를 ‘자애로운 어머니’로 숭배한 인간의 생태 의식은 바다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평생 ‘라 마르’에서 고기잡이를 해왔던 주인공과 달리 젊은 어부들은 노인의 작은 조각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모터보트를 타고 자신이 정복해야 할 ‘엘 마르’와 그곳에 사는 커다란 물고기를 위해 나아간다. 그들은 84일째 어떤 고기도 잡지 못한 노인을 비웃지만, 노인은 그런 반응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유일하게 자신을 따르는 소년 ‘마놀린’과 함께 고기 잡을 준비를 한다.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나는 일은 아마 모든 이들이 다 아는 내용일 것이다. 그는 며칠 동안 바다에서 사투를 벌여 커다란 청새치를 잡는 데 성공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여러 상어로부터 청새치 살점을 빼앗기고 뼈만 남은 고기와 함께 항구로 돌아온다. 지칠 대로 지친 노인에게 소년은 말한다. ‘할아버지가 고기한테 지신 게 아니에요. 고기한테 지신 게 아니라고요.’
산티아고는 어떤 것과 싸워온 것일까. 평생을 바닷사람으로 살아온 그에게 있어 바다라는 삶의 터전과 거기서 잡아 올린 수많은 물고기는 하나의 자서전과 다름없었다. 젊고 활기가 넘치던 시절에 산티아고는 누구보다도 크고 억센 고기를 수없이 잡았지만, 지금의 그는 그저 낚싯줄을 물고 자신의 조각배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커다란 고기와 신경전을 벌이는 늙은 남자일 뿐이다. 이 과정에서 산티아고는 계속 혼잣말을 한다. 자신이 잡는 고기가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부터 자신이 존경하는 야구 선수인 조 디마지오에 관한 생각까지, 그는 남들이 보기에는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주절대며 바다 한가운데서 사투를 벌인다.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것은 산티아고가 사흘 동안 자신처럼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한 청새치와 대결하며 그를 친구처럼 생각한다는 점이다.
‘고기가 나를 데려가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고기를 데려가고 있는 건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고기를 뒤에 두고 끌고 가고 있는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고기 놈이 모든 위엄을 잃어버린 채 지금 배 안에 있다고 해도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지, 하지만 고기와 배는 지금 서로 묶인 채 나란히 항해하는 중이야. 만약 고기 놈이 나를 데리고 가는 거라면 그렇게 하라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내게는 꾀가 있어 저놈보다 나은 것일 뿐 저놈은 내게 아무런 적의도 품고 있지 않았거든.’
‘난 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데다 죄를 믿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아, 고기를 죽이는 건 어쩌면 죄가 될지도 몰라. 설령 내가 먹고살아가기 위해, 또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한 짓이라도 죄가 될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죄 아닌 게 없겠지.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또 죄에 대해 생각하는 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야. 죄에 대해선 그런 사람들에게나 맡기면 돼. 고기가 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넌 어부로 태어났으니까. 산페드로도 저 훌륭한 디마지오 선수의 아버지처럼 어부였지.’
산티아고에게 바다는 투쟁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바다라는 무대에서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법칙에 순응해야 할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청새치를 잡는 일을 적개심을 가지고 적과 싸우는 행위라기보다는 태초의 자연의 질서에 따른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따라서 나는 이 지점에서 힌트를 얻어서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라는 유명한 구절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84일 동안 한 마리도 잡지 못하다가 끝내 청새치를 잡는 데 성공하지만, 피 냄새를 맡고 뒤따라온 상어에게 모든 살점을 뜯기고 뼈만 남긴 채 마을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가치를 모두 잃었다고(파멸당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바다에 있던 사흘 동안 그는 정신적으로 위축되지 않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결국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산티아고는 정신적으로 패배하지 않고 승리를 거둔 셈이 되었다. 그는 물질적, 신체적 가치를 잃었지만, 정신적 가치를 잃지 않았다. 이는 자신의 운명과 벌인 싸움에서 거둔 가장 귀중한 전리품인 셈이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이 소설을 청새치를 잡는 어부의 마음으로 썼을 것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와 같은 과거 자신의 문학적 성공을 다시 이루고 싶은 심정으로 자신의 바다를 나서는 그를 상상해본다. 젊은 시절 많은 고기를 잡는 어부로 살았지만 늙어서는 어떤 고기도 잡지 못했다고 비웃음을 받았던 산티아고로부터 종군 기자로 근무하며 많은 명작을 써냈으나 나중에는 어떤 글도 인정받지 못했던 헤밍웨이를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