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뷜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읽고 쓰다
1. 소설은 작가가 살던 시대의 모습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특히 교과서에 기록될만한 사건들이 터진 해에 작가가 존재했다면, 그는 좋든 싫든 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독일의 작가 하인리히 뷜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47그룹, 68혁명 등, 그의 문학 역사는 독일의 굵직한 현대사와 나란히 걸을 수밖에 없었다. '전후 독일의 정신적 폐허를 직시한 작가'라는 소개말처럼, 그는 전쟁 이후 수많은 사상의 장으로 변해버린 조국을 자신의 작품 속에 담았다. 1975년에 발표한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부제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스스로의 물음에 대한 해답이다. 소설은 자신의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여자 '카타리나 블룸'의 명예가 그녀가 연루된 사건을 취재하는 언론의 잘못으로 짓밟히게 되어 결국 그녀로 하여금 기자를 살해하게 만들었다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그녀를 향한 언론의 비가시적인 폭력은 결국 살인이라는 가시적 폭력으로 전환되었다. 소설의 내용은 당시 독일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71년에 독일에서 일어난 어느 살인 사건을 두고 어떤 언론사가 범인을 68운동 당시 시위의 양상을 두고 폭력 행사로 대응하자는 입장을 고수하던 과격파이자 테러조직인 '바더 마인호프' 그룹의 소행이라고 단정 짓자, 작가인 뷜은 아무런 증거 없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추측성 기사를 쓰는 해당 언론사의 보도 방식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하지만 그의 글을 그저 마인호프에 대한 옹호라고 이해한 사람들은 분노와 저항 의식을 바탕으로 그를 공격하였고, 결국 그들 부부는 오랜 기간 동안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을 정도로의 위협에 시달렸다.
2. 그저 눈길을 끌기 위해 보도지침과 기자의 기본적인 윤리 의식을 망각한 채 자극적인 제목과 내용을 담은 기사를 연일 내보내는 언론사, 사실 관계를 알아보지 않고 그저 자신의 입맛에 맞는 기사만 골라 읽고 상대방을 비방하고 음해하는 대중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언어와 진실 왜곡에 고통받고 신음하며 심지어 목숨을 잃기까지 하는 이해당사자들. 어쩌면 사회와 개인,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은 당시 독일이나 오늘날의 다른 사회들이나 피차일반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론이 개인 혹은 사건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언어의 미묘한 차이가 의도하지 않은 나비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오늘날의 대중들과 언론인들이 위와 같은 점을 더욱 중요시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기술의 발전 여부 때문일 것이다. 작가 하인리히 뷜이 살던 1970년대의 독일은 유튜브와 트위터가 없었다. 그저 잡지나 신문, 라디오밖에 없었던 시절에 이슈를 다루는 것은 유명 언론사들이나 잡지사들뿐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알고 싶지 않은 정보도 머릿속에 집어넣어 주는 유튜브와 SNS의 시대이다. 그리고 이런 기술적 이점이 넘쳐흐르는 강에 가장 먼저 배를 띄우고 노를 젓는 이들은 아마도 정치인들일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의 결함을 세상이 묵인하고 있다는 데서 오는 분노,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데서 오는 조급함, 특정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오는 안정감과 유대감, 자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지적 허영심, 내가 원하는 정보만 찾으면서 자신의 믿음을 단단하게 만드는 확증 편향 같은 대중의 속성을 일찍이 파악하고 거기서 돈 냄새를 맡았다. 그래서 그들이 유튜브와 팟캐스트에 올리는 영상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이었으며, 심지어 사실이 아님에도 오피니언이라는 명목하에 그것을 자랑스럽게 내밀었다. 이런 영상 제작의 메커니즘은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우월하다 내용으로 점철된, 소위 '국뽕 유튜브'와도 비슷하다.
3. 나는 이런 욕망과 영합한 콘텐츠들이 얼마나 대중들 속에 깊이 파고들고 또 어떤 해악을 가져오는지 알 게 되었다. 그런 영상들은 10분짜리부터 1시간을 넘는 영상들까지 다양해서 마치 라디오처럼 하루 종일 들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예전엔 택시를 타면 항상 라디오를 듣거나 기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곤 했지만, 지금은 거의 열에 일곱 혹은 여덟은 거의 그런 영상을 틀어놓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동사무소에서 쌀 배달을 나갈 때 운전을 해주시는 주사님도 항상 그런 영상이나 찬송가를 틀어놓곤 하셨는데, 나에게 그런 주제와 관련해서 말을 걸진 않으셨지만 주변 주사님들의 말을 들어보면 거의 매일 비슷한 정치 얘기를 한다고 했다. 대부분은 분노가 기저에 깔려있는 대화였다는 말도 함께. 그리고 그것이 가져오는 해악은 아마도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다 알 것이다. 나는 위에서 쓴 대중의 속성을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콘텐츠와 연관 지어 썼지만, 그것은 종교와도 관련이 있다. 지난달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 나라가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믿음에서 오는 분노, 그래서 그들은 태극기라는 가시적인 수단으로 자신들의 비가시적인 분노와 유대감과 허영심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그들의 분노에 대한 대가는 엉뚱한 사람들이 치르게 됐다. 지금도 바이러스를 막으러 돌아다니는 역학조사관들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그분들은 심지어 협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릎까지 꿇었다고 했다. 정작 사과해야 할 사람들은 나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4. 기성 언론사의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대부분이 잘 아는 유명 신문사 중 한 곳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으기 위해 출처가 불분명하고 신뢰성이 없는 정보를 기사에 사용했다가 네티즌들의 질타를 받았다. 대부분이 SNS나 블로그에 떠돌아다니는 가짜 뉴스를 근거로 기사를 작성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정보를 짜깁기해서 자극적인 부분만 기사에 사용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를 주제로 삼은 기자들의 작품이 다 그러했다고 말하기는 무리가 있지만, 씁쓸한 점은 그렇게 만들어진 자극적인 기사 몇 개가 오히려 파급력이 더 강력했다는 사실이다. 오늘 소개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의 배경은 1970년대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뒤를 집요하게 캐는 '차이퉁' 지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오히려 반발심이 들 정도로 근거 없는 추측과 자극적인 언어를 사용해 대중들의 관심을 끄는 기사를 낸다. 하지만 사건이 진행될수록 스캔들에 대한 관심과 차이퉁 지의 판매 부수는 나날이 상승하고, 그들은 많은 돈을 번다. 관심의 척도가 판매 부수에서 온라인 기사 조회 수로 바뀐 오늘날에서도 이 법칙은 공고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