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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희 Jul 17. 2020

종교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고 쓰다

종교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지 않은 인간은 없을 것이다. 인간을 향한 원죄 의식의 강요나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죄의식을 수반하도록 하는 종교 지도자와 교리의 가르침은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인간의 반항에 오랜 시간 도전받았다. 사실 종교는 오늘날 사회 문화의 여러 구성 요소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과거 모든 사회 질서 수립의 바탕이 되었던 가톨릭이나 기독교 같은 종교의 위상과 비교해보면 그 위세가 많이 격하되긴 했지만, 종교는 여전히 인간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문화 중 하나이다. 물론 어렸을 때 어머니의 실수로 다녔던 기독교 유치원과 초등학교 때 친구 따라갔던 여름 성경 캠프를 제외하고는 나의 삶과 종교의 접점은 없다. 그래서 명절엔 제사도 지내고, 밥 먹을 때는 따로 기도를 드리지도 않는다. 하지만 점점 커가면서 종교에 대한 의문점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비극과 참상의 뉴스를 보고도 이를 어쩔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설명하는 친구, 각종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 그리고 그들의 범죄 소식은 내가 종교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를 자문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나는 그저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근본적인 사회적 질서의 문제나 종교에 대한 스스로의 무지를 탓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을 기회도 없었고, 이런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쳐준 사람도 없었으니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번에 내가 읽은 이문열 작가의 ‘사람의 아들’은 미약하게나마 위와 같은 나의 의문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 소설이었다. 작가는 ‘민요섭’이라는 남자가 왜 살해되었는지 수사하는 ‘남 경사’의 이야기와 소설에서 남 경사가 수사하며 읽은 민요섭의 노트에 나오는 ‘아하스 페르츠’라는 사람의 또 다른 이야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사회와 인간,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종교가 각각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지 설명했다. 민요섭은 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재학하고 있던 학생이었지만, 기독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에 휩싸여 신학교를 자퇴하고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조동팔’이라는 학생과 함께 전국을 돌며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었고, 그러한 행적 때문에 남 경사는 그가 왜 살해되었는지 의문을 가졌다. 주변 동료들은 그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여자나 돈 문제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라 추측하며 조사하다 이내 관심을 잃지만, 계속해서 그의 노트를 읽고 있던 남 경사만큼은 사건을 포기하지 않고 조사를 이어나간다.



  노트에 쓰인 내용은 민요섭이 자퇴한 이후로 나중에 진범에게 살해당하기 전까지 했던 모든 행동에 대한 사상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거기에는 기독교 전설 속 ‘아하스 페르츠’라는 남자와 그의 기독교적 회의감으로 비롯된 긴 여행, 그리고 그에 대한 민요섭의 생각이 적혀있었다. 아하스 페르츠는 랍비의 아들로 태어나 히브리어와 아람어, 헬라어 등 다양한 언어를 배우고, 그가 사는 사회의 규율과 관습을 일찍부터 모두 깨우치는 총명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테도스라는 가짜 예언자와 함께 고통스러운 사람들의 생활과 그들이 모여있는 사회의 진짜 모습을 지켜봄과 동시에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기독교의 현실적 한계를 깨닫고 이에 대한 자신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전 세계를 떠돈다. 그러다 어느 광야에서 ‘위대한 지혜’를 만나게 되고, 그 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경전 속의 예수를 만나 논쟁한다.



  잘 다니고 있던 신학교를 뛰쳐나오게 만든 민요섭의 회의감이 어떤 것이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아하스 페르츠가 긴 여정을 마무리하고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됐는지 찾아볼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가 다양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본 종교들은 원래 믿고 있던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름만 다른 다양한 신들과 그들의 신화는 대부분 아하스 페르츠가 믿었던 종교의 구성 요소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 엇비슷한 신화 체계와 수많은 신에 지쳤던 그는 결국 ‘신이 나를 따라올 때이며 뒤쫓을 때가 아니라 마중할 때’라며 고향으로 돌아가버린다. 그런데 그는 ‘쿠아란타리아’ 광야라는 곳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거기서 마주친 위대한 영(靈)과의 대화와 깨달음은 뒤이어 나오는 ‘쿠아란타리아의 서’라는 민요섭의 새로운 경전에서 잘 나타난다.




  ‘쿠아란타리아의 서’는 소설 내내 등장하는 아하스 페르츠의 깨달음과 이에 영향을 받은 민요섭의 행적을 모두 설명해줄 수 있는 하나의 근거로 작용함과 동시에, 아하스 페르츠와 예수가 논쟁하는 장면과 함께 소설 속의 압권으로 평가받는 부분이다. 그의 기독교적 변신론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불안과 욕구를 타인에게 의탁하고자 하고, 신은 인간의 이러한 모습을 모두 받아주고 있다. 인간에 대한 ‘전체적인 타자’로 기능하는 신은 자기 파괴적인 의탁을 하는 인간에게 심리적 안정과 희열을 안겨준다. 이 현상은 신의 경험 불가능성에 의해 더욱 강화되며, 반복되는 이러한 메커니즘은 신을 더욱 완벽한 존재로 인간에게 각인시킨다. 낙원 회복의 약속, 메시아주의, 천년왕국설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타나며, 인간의 고통에 대한 불만을 눌러버린다. 아하스 페르츠는 바로 이 지점에서 경험 불가능한 신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에 대한 경험적 반증으로 변신론을 반박한다. 예수와의 논쟁에서 그는 계속해서 인간을 말로 현혹하지 말고, 그들의 투쟁과 노력을 방해하지 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말보다는 빵을 중요시하는 그의 모습에서 마르크스의 논리가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하스 페르츠의 논리는 그렇게 소설 후반부에서 ‘쿠아란타리아의 서’에서 비로소 구체화된다.


그런데도 홀로 남은 야훼의 선(善)은 너희 많은 것을 금지와 결핍과 불완전 속으로 끌어내리고, 존재 자체마저 그의 수단으로 바꾸어버렸다. 너희 본성의 양면(兩面) 중에서 나로부터 비롯된 반쪽을 그의 말씀이 단죄하였기 때문이며, 반분(半分)의 권리로 전체를 차지하려는 그의 천한 지배욕이 복종하는 너희에게 내릴 은사금(恩賜金)을 복종시키려는 너희로부터 약탈해갔기 때문이며, 절대 유일(絶對唯一)의 지배를 꿈꾸는 그의 허영이 너희를 모든 피조물의 복종을 재는 척도(尺度)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날에는 부질없이 하늘을 우러러 우리를 찾지 말아라. 우리는 땅 위에 너희를 세웠으니 구원도 용서도 땅 위에서 구하라. 진실로 이르노니, 너희를 억압하고 우리의 거룩함을 보탤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중략) 너희를 가장 잘 섬긴 자가 곧 우리를 가장 잘 섬긴 자이며, 모든 것은 너희에게서 일어나고 너희에게서 끝나리라.


  아하스 페르츠는 야훼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인간의 고통과 죄악을 인간의 탓으로 돌리고, 그것을 미끼로 인간들의 의탁 위에 군림하고 있던 그를 반쪽짜리 신이라고 말할 뿐이다. 따라서 민요섭은 기존의 야훼, 그리고 ‘위대한 지혜’가 합일된 새로운 신을 찾아내어 그의 오래된 의문을 해소한다. 하지만 새로운 신은 자신을 섬기라 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힘으로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라고 조언할 뿐이다. 이는 엄밀히 말해 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닌, 사회의 정의를 충실히 이행하는 모양새로 나타난다. 소설은 바로 이 부분에서 스스로가 신의 문제보다는 인간에게 조금 더 집중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안타까운 점은 민요섭의 논리가 또 다른 무신론의 탄생이 아니냐는 그의 새로운 회의로 인해 꺾이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목숨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소설 속 아하스 페르츠가 주창한 새로운 사상은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었을까? 그 신은 인간의 의지와 힘으로 정의를 세우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의 현대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당시에 얼마나 뜬구름 잡는 이야기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승만이 하야하고 새로운 민주정권이 들어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쿠데타로 인해 군부정권이 들어서자 언론과 출판의 자유는 모두 사라지기 시작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대었다. 작가는 그러한 현실 속에서 신을 부정하는 방법으로까지 꺼내며 입막음하는 시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을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그저 신에 대한 부정이 주된 내용인 소설보다는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던 당시 사회를 향한 일종의 조소가 아니었을까. 비록 아하스 페르츠의 새로운 사상에 감명받은 민요섭의 의지가 나중에 가서 너무 쉽고 허무하게 꺾인다는 점이 소설을 읽고 있던 나에게는 큰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이문열 특유의 빨려 들어갈 듯한 서술 능력과 반기독교적 논리를 통해 인간과 사회의 모습을 조명하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반짝이는 이 작품은 도발적인 시대의 역작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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