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고 쓰다
트로트 광풍이 불던 지난 몇 개월 동안에도 나는 트로트를 그다지 찾아 듣는 편이 아니었다. 다른 집 부모님들은 다 각자의 원픽이 있으셔서 하루 종일 임영웅 노래만 나오는 유튜브 영상을 틀어두신다거나 영탁 노래만 멜론 스밍을 돌린다고 하시던데, 우리 집은 원체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짜장면 대신 트로트가 싫다고 하셨다. 엄마가 점심을 드시러 가는 병원 주변 식당에서는 하루 종일 영탁 노래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 집이 트로트를 즐겨듣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다 그러는 것은 아니었나 보다. 이번 추석에 시골로 내려가지 않았던 우리 집은 방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여유를 즐겼다. 나와 엄마는 거실에서, 아빠는 안방에서, 동생은 자기 방에서 뭔가를 했다. 나는 추석 특선 영화가 뭐가 나오나, 하고 리모컨으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나훈아 콘서트가 나오는 것을 봤다. '왕년의 트로트 스타', 이 정도가 내가 생각하는 그의 유일한 이미지였다. 하지만 다음날 나온 뉴스를 보고 그를 다시 봤다. 시청률 70%. 물론 케이블 티비 기준이겠지만, 그래도 이곳저곳에서 수십 퍼센트는 우습게 넘기는 그의 티켓 파워를 보고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테스 형'이라는 유행어도 생겼다. 나는 처음에 그가 나훈아에게 곡을 써준 작곡가 예명인 줄 알았다. 예전에 신사동 호랭이나, 아니면 용감한 형제 같은 그런 사람들이 히트친 아이돌 노래를 많이 써준 것을 본 기억이 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런데 세상에, 그는 소크라테스였다. 이유를 안 순간에 5분 동안은 계속 낄낄거렸던 것 같다.
게다가 유시민의 '계몽군주' 발언 사건도 터졌다. 어느 공무원이 북한 군인에 의해 사살된 사건이 발생하자, 김정은은 며칠 뒤에 남한으로 사과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런 이례적인 행동에 대해 정부는 긍정적인 제스처를 취했고, 이에 대한 유시민 작가의 발언이 논란이 되자, 그는 자신을 비난한 사람들을 향해 '2500년 전이면 소크라테스를 죽인 사람들'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여하튼 최근에 핫했던 이 두 사람들 덕분에 소크라테스가 무슨 일을 하다 죽었는지 궁금해진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수능 국어 지문에 나오지 않고서야 당장 인기 검색어에 오를 일이 딱히 없던 소크라테스가 갑자기 등장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마침 얼마 전에 중고서점에서 크리톤, 파이돈, 그리고 향연이 포함되어 있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을 샀기 때문에 오늘은 리뷰를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었다. 그는 석공인 아버지와 산파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소피스트들의 말장난을 참교육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철학적인 대화를 나눠 '상대방의 오류와 모순을 드러내고 그 무지를 스스로 깨닫게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행보를 아니꼽게 본 당시 소피스트들과 보수주의자들은 그를 '청년을 타락시킨 죄'라는 명목으로 고발되어 사형에 처한다. 재판에 나온 사람들은 자기가 무죄라고 주장해야 살 수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변호사 없이 스스로 재판장에게 자신을 변호하기 시작하는데, 그게 바로 50페이지 분량의 짧은 글로 남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편이다. 그리고 '크리톤' 편은 사형을 선고받은 소크라테스를 도망치도록 도우려 한 크리톤과, 그에게 자신이 떠나지 못한 이유를 드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파이돈과 향연은 아직 읽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포스팅에서는 제외하려고 한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변명 편에서는 그가 많은 예시와 비유를 들어 자신이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는 것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더 큰 해약이 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데, 그 이유가 바로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소크라테스의 위상을 봤을 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자뻑도 이런 자뻑이 있을까?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의 친구인 카이레폰이 델피의 신탁을 근거로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그것만 가지고서는 확답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정말 신탁의 내용이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 정치인들과 시인들, 그리고 수공 기술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모르는 것에 대해서 모른다고 대답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잘 안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인들은 시 짓는 기술 때문에 지혜롭지 못한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다른 이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믿고 있었고, 기술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들과는 달리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고,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점을 근거로 들어 다른 이들보다 지혜롭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 과정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과 시기를 받았다. 통념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기술자들의 상태에 대해서 그것이 자신의 상태보다 나은지 자문자답하기도 했다. 그리고 후에 가지게 된 확신을 바탕으로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향해 반박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들은 모두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아닌 ‘철학함’의 성질을 반영한 것으로써, 그가 다른 누구보다 이론과 실천을 체화해 낸 ‘실천적 지식인’임을 알리는 근거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사람들이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고대 그리스에도 많았다는 사실, 아테네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 쓰인 공자의 경전 ‘논어’에서도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앎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는 구절이 존재했다는 점을 미루어보아, 인간은 이러한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고치려 노력해왔다는 역사와 함께 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오늘날에도 그러한 사람들은 여전히 많지만 말이다. 그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좁은 지식과 견문으로 어리숙한 다른 이들을 속이고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듯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이전과는 다른 정보의 홍수가 세상을 휩쓸었고, 이는 눈 깜짝할 새 대중들을 눈멀게 하는 상황을 초래했기에, 혹자는 지금만큼 철학이 요구되는 시대가 없다고 말한다. 단순히 이런저런 지식을 많이 알고 있을 뿐, 그것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지니고 논쟁하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은 더 열성적인 자신의 팬들을 모으기 위해 참과 거짓인 원인을 구별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거짓된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다. 유튜브와 각종 SNS에 올라오는 가짜 뉴스와 한국의 것이 무조건 최고라고 여기는 ‘국뽕’ 영상, 공공의 이익을 위하는 척하며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뒤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다양한 시민단체와 종교인들, 그리고 이들의 선동에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왜 ‘철학함’을 배워야 하는지 생각한다. 현대의 말(馬)에는 이제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커다란 등에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을 바라보는 올바른 기준을 세우기 위해 항상 반성하며 살아가는 개미들만이 존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