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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희 Nov 17. 2020

삼진 그룹을 향한 몇 가지 시선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보고 쓰다.


  얼마 전에 친구와 같이 오랜만에 영화관에 갔다. 코로나가 아무리 기승을 부리는 시기라지만, 평일 저녁 영화를 6,000원에 볼 수 있다는 메리트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친구가 내게 요즘 볼만한 영화는 무엇이 있었냐, 라고 물어본다면 딱히 추천할 작품이 없다. 올해 코로나 때문에 개봉을 연기한 유명 감독들의 작품들, 이를테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나 디즈니의 마블 시리즈 ‘블랙위도우’와 ‘이터널스’ 등은 팬들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내년으로 개봉을 미뤘다. 특히 마블 시리즈가 다음을 기약하게 됐다는 소식은 나에게도 큰 아쉬움이었다. 어벤저스 시리즈가 마무리된 이 시점에서 캐릭터들의 뒷이야기를 영화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예전부터 기대를 많이 했기에 더욱 안타까웠다.


  하지만 어쨌든 영화관에 가면 뭐든 간에 볼 수 있는 영화는 존재한다. 특히 해외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을 연기하자, 이를 틈타서 한국 영화가 상영관을 차지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도 그중 하나였다. 취업난이 아무리 심각해져도 토익 공부를 주제로 영화가 나오는 것은 처음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딱히 볼 것도 없으니 영화를 예약했다.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입사 8년 차 입사 동기인 생산관리 3부 ‘이자영(고아성)’, 마케팅부 ‘정유나(이솜)’, 회계부 ‘심보람(박혜수)’은 대리 승진의 꿈을 품고 기준 점수 토익 600점을 달성하기 위해 영어반에 들어가지만, 잔심부름을 위해 출장을 갔던 공장 근처에서 폐수가 유출되는 광경을 목격하고 고민에 빠진다. 자영은 회사에 이 사실을 보고하지만, 이내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친구들과 힘을 모아 회사에 대항한다. 하지만 사건을 조사하면 할수록 그녀들은 거대한 음모가 숨어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는 두산전자가 낙동강으로 페놀을 유출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당시 두산은 이 사건으로 인해 회장이 사임했고, OB맥주를 비롯한 대부분의 소비재 관련 계열사를 매각하고 중공업으로 눈을 돌렸다. 사건을 일으킨 두산 경영진과 관련 인물의 도덕적 해이와 책임 회피는 영화에도 잘 묘사되어있다. 기준치를 훨씬 넘긴 페놀이 검출되었다는 보고서를 파기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정확한 보고를 올리지 않는 등, 실무진과 경영진은 기본 원칙을 무시하고 그저 회사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업무를 진행했다. 영화에서 삼진 그룹은 김영삼 대통령의 정책 기조 중 하나였던 ‘글로벌’이라는 키워드에 걸맞게 고군분투한다. 그래서 마케팅부는 스마트한 이미지의 CEO였던 빌리 박 사장을 광고 모델로 기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전 직원이 아침 체조를 하는 둥의 노력을 한다.


  삼진 그룹은 ‘글로벌 삼진’을 외치지만, 정작 임신 때문에 퇴사할 수밖에 없는 여직원의 눈물과 아침마다 다른 남자 직원보다 먼저 출근해서 비율에 따라 커피를 타고, 쓰레기를 정리하며, 담배 심부름을 하는 여직원들의 모습은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상명하복, 권위주의, 성별에 따른 차별을 기초로 한 삼진의 기업 문화에서 나는 그들이 좋아하는 ‘글로벌 삼진’을 볼 수 없었다. 언젠가 이건희 전 회장은 ‘기업은 2류, 정치는 4류’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내가 본 영화 속 삼진은 2류에도 속하지 못했다. 기업의 혁신과 비전 달성은 인간을 인간답게 대우하는 조직 문화에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영화 속 삼진의 모습은 ‘이렇게 행동하면 망한다’라는 경영학 원론 전공 서적의 대표적인 사례로 수록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주인공들은 영화 내내 진상 밝히기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은 당장 상사에게도, 자신의 후배에게도 방해를 받는다. 증거를 모아 언론에 터뜨리지만, 회사의 뒷공작으로 인해 모든 노력이 허사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을 돕는 이들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다른 여직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힘을 모아 미리 숨겨둔 증거들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심하고, 이는 제대로 먹힌다. 사실 약자의 연대를 중심으로 한 서사는 비단 이 영화에서만 다뤄지는 것이 아니다. 전 세계의 영화 혹은 문학에서 이런 내용이 전개되는 것은 이제 관객과 독자들에게 익숙해졌을 것이다. 특히 여성과 동성애를 주제로 만든 여러 콘텐츠는 개인적으로는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고 느낄 정도로, 나는 근래 읽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대부분 이런 주제를 다루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 이런 작품들의 성공 여부는 줄거리와 연출이 뻔한 클리셰에 잠식된 채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연출로 사람들에게 신선함을 줄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다.



  이 점으로 미루어보아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마무리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영화에서는 추리 소설을 좋아한다는 설정의 마케팅부 직원 ‘정유나’가 회사와 호텔 이곳저곳에 잠입해서 마치 소설 속 탐정이 사용할 것 같은 방법 그대로 증거를 수집하는 모습이나, 해외투자회사의 직원들과 삼진 그룹의 CEO가 회사를 매각하려는 순간에 외치는 어설픈 영어로 이루어진 구호들이나 갑작스러운 생산관리부의 직원 등장 장면은 너무 뻔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만약 감독의 의도가 ‘약자들의 사회적 연대와 파급효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었다면, 권선징악을 통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결말의 채택은 관객들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오글거렸다는 기억만 남겼기에 목적 달성 실패의 일등공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떡밥은 많이 뿌렸으나 어떻게든 끝을 내기 위해 결국 뻔한 결말을 선택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또, 실제 두산의 페놀 유출 사건에서 시민이 주도적으로 항의한 사실 역시 영화에서는 크게 부각 되지 못했다. 영화에서는 그저 농촌 주위의 하천에 페놀이 유출되었지만, 실제로는 대구광역시 취수장에까지 페놀이 흘러 들어갔기 때문에 모든 대구 시민이 피해를 보았던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시민들은 단체를 조직하고 관련 공무원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으며, 두산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회사 내 여직원들을 비롯한 직원들이 힘을 모아 모든 주주의 동의서를 받아서 회사 매각을 막았다는 식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그리고 페놀 유출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은 힘이 없어 저항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로 끝까지 남았다. 만약 약자들의 연대로 인한 힘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이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 역시 카메라에 담았어야 했다.




  개인적으로 너무 애매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너무 무겁지 않은 영화를 위해 선택한 결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면 차라리 분위기를 제대로 잡고 가던가, 혹은 오락에 치중한다면 이병헌 감독 느낌의 유머라도 넣던가 했으면 했다. 하지만 영화는 두 마리 토끼를 잡지 못했다. 요즘 유행하는 주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달하는 일은, 가장 접근하기 쉽지만 동시에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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