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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사입니다

상담사 일기

by 광주 이혜숙

나는 출근하는 아침 시간이 참 좋다. 20년간 청소년 상담사로 활동하다가 은퇴하고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붉은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집을 나선다. 마을 어귀까지 걸어서 가는 길은 달맞이꽃 나팔꽃이 방긋 웃으며 인사를 하고 이름 모를 꽃들도 나를 반긴다.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참 영롱하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구령에 맞추어 국민체조를 한다. 파란 하늘과 푸른 산을 보며 맑은 공기를 흠뻑 들어 마신다. 버스 창가로 지나가는 들녘이 황금물결이 되어 넘실대던 때가 얼마 전이었는데 추수를 하여 허허벌판이 되었다. 감나무에는 감들이 주렁주렁 열려있다. 한 시간 지나서 버스에서 내려 천변을 40분 동안 걸으면 이마와 목에 땀이 제법 흐른다. 황새와 비둘기 그리고 참새들이 짹짹거리며 날아다녀 활력이 넘친다. “무궁화 꽃 동산”을 걸을 때면 무궁화 꽃처럼 나도 힘든 일이 있을 때는 끈기를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직장에 도착하여 오늘 맞이할 고객들을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내 나이 65세, 바쁘게만 살아온 나를 위해 쉼이 필요했지만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2년 전에 교육을 받고 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국민건강 보험공단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사 모집이 있어서 지원해 볼 생각을 했다. 기대감에 부풀어 지원을 하였지만 불합격되어 실망이 되었다. 올해에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도전해 보았다. 그 결과 1차 서류전형을 통과하고, 면접까지 하고 드디어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이윽고 4월 1일 첫 출근하는 날이다. 설레는 마음보다 긴장되는 날이었다.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지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시간이 가면 잘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견뎠다.


7개월간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사로서 일하면서 1,300명 이상의 고객을 만났는데 그 중에 몇 분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00월 00일

보행기를 끌고 오신 80대 어르신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을 하시고 시내버스를 타시겠다고 하는데, 집으로 가는 방향을 잘 모르겠다고 하신다. 나는 어르신을 부축해서 큰 길에 있는 버스 정류장까지 동행하였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 자신이 힘들게 살아온 이야기를 하였고 나는“그러셨군요”,“힘드셨겠어요”하며 위로의 말을 해 드렸다. 한참 후에 버스가 오자 보행기를 버스 안으로 올리고 잘 가시라고 손을 흔들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벼웠다.‘내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사가 된 것은 어르신들을 섬기는 일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나는 섬기는 일만큼은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고,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어서 자신감이 생겼다. 나 스스로 작은 일이지만 착한 일을 한 것 같아서 마음이 뿌듯하였다.

00월 00일

80대의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온 40대 딸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신청서를 쓰는 어머니를 지켜보고 있다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항상 젊고 건강하실 것만 같았던 우리 어머니가 벌써 이렇게 된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파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어머니 생각이 나서 눈물이 핑 돌았다.

00월 00일

노부부가 등록을 하기 위해 방문하셨다. 남편의 마스크가 오래 쓰셨는지 너무 낡고 오물이 묻어 있어서 내가 갖고 있는 마스크를 꺼내드렸다. 깨끗한 마스크를 쓰신 모습을 보고 “어르신 참 멋있네요!”하자 “그래요~”라고 하시며 쑥스러워하셨다. 어르신의 얼굴이 환해져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00월 00일

비가 오는 날인데 퇴근 10분 전에 80대 노부부가 오셨다. 길을 몰라 한 시간을 걸어서 물어물어 찾아오셨다고 두 분이 비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두 분을 맞이하고 냉수 한 잔을 드시도록 하였다. 부인은 당뇨로 손이 떨리고, 무학으로 자신의 이름을 쓸 줄 모른다고 하셨다. 흰 종이를 꺼내어 어르신의 이름을 크게 써 놓고, 보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한 자 한 자 쓰시도록 했다. 나는 어르신의 손을 함께 잡기도 하고 설명해 드리면서 40분간 연습하여 드디어 이름 석 자를 쓰시게 되자“어르신 100점이에요!! 100점!!”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어르신도 “고맙소, 상담사님 덕분에 평생에 처음으로 내 이름을 쓸 수 있게 되었네!”

두 분이 손을 꼬옥 잡고 가시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구름 속에 숨어있던 햇님이 얼굴을 살며시 내밀어 웃고 있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19세 이상의 사람이 향후 겪게 될 임종 단계를 가정하여 연명의료에 관한 자신의 의향을 미리 밝혀두는 문서이다.「연명의료결정법」제11조에 따른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에서 작성

“연명의료중단 등 결정”이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에 대한 연명의료를 시행하지 아니하거나 중단하기로 하는 결정을 말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하러 오시는 분들의 연령대는 대부분이 60대~80대 분들이 많았는데“이태원 사고”이후에는 20대~50대가 자신에게도 언제 죽음을 겪게 될지 모르는 불안으로 인해 죽음에 대하 준비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하면서 등록을 많이 하고 있는 추세이다.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된 지 4년째 6개월이 되었는데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 현황은 작년 기준으로 광주·전남은 인구 대비 2%밖에 되지 않는다. 아직도 광주는 보건소 가운데 2곳만이 등록기관으로 되어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활성화를 위해 등록할 수 있는 곳을 모든 보건소로 확대하고, 공공기관에도 팜플렛 등을 비치하여 홍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도 주말이면 이웃마을을 돌면서 홍보를 하는데 시골 어르신들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대해서 잘 모르신다. 웰다잉교육을 받고 상담사 자격을 취득한 시니어 상담사가 많이 배출되었는데 여러 곳에서 상담사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으면 좋겠다.


퇴근 시간이 되면 남편이 차로 나를 데리러 온다. 집으로 올 때는 둥근 달이 하늘에 떠있는 것을 본다. 남편은 텃밭에서 흙을 만지며 시골 생활을 즐기고 있다. 저녁 식탁은 텃밭에서 따온 싱싱한 고추, 호박, 오이, 가지, 깻잎 등이다. 시골에 사니까 건강한 먹거리가 풍성하여 마음까지도 풍요로운 것 같다. 저녁 식사를 하고 남편과 들판을 돌아다닌다.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하며, 때로는 논두렁에 빠져서 흙투성이가 된 모습을 보며 서로 웃기도 한다. 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개구리소리, 뻐꾸기소리, 닭, 고양이 개들의 짖는 소리가 정겹다. 깜깜한 하늘에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을 보며, 북두칠성도 찾아본다. 오늘 밤은 북두칠성이 유난히 빛난다. 나도 저 별처럼 어둠을 밝혀주는 등대가 되었으면…. 오늘 하루 동안에 만났던 어르신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분들의 여생이 건강하고 행복한 날들이 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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