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아산역이다.
회사 연수원에 가기 위해 새벽기차를 타고 왔다. 지금은 역사에 있는 베이커리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으며 연수원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다. 따듯한 커피 한잔과 따듯한 키스자렛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방금 기차가 도착했는지 통창 너머 계단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여행가방을 손에 쥔 채 두리번거리는 몇몇이 눈에 띈다. 언젠간 나도 유럽의 어느 기차역을 두리번거리며 지나가겠지. 이런 생각을 하니 왠지 여행자의 아침을 보내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코발트색 배낭을 멘 외국인을 보고 잠시 가슴께에서 설렘이 일렁인다.
이어폰에서 흐르는 키스자렛의 음악과 사람들의 풍경이 그럴싸하게 어우러진다. 편안하고 넉넉한 미소가 입가에 번지는 좋은 아침이다.
장거리 이동은 자동차보다 기차를 선호한다.
기차를 타고 창밖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여행을 떠나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고속버스에서는 좀처럼 느끼기 힘든 정취다.
비행기보다 자동차보다 기차는 안락함을 준다. 기차는 빠르지만 그 체감속도는 그렇지 않다. 객차 내의 이동 또한 자동차나 비행기에 비해 부담이 적다. 기차라는 이동수단은 적어도 내겐 편안한 여행의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는 거다.
문득 오는 10월 친구들과의 후쿠오카 여행을 상상해 본다. 친구들에게 하룻밤 내내 술을 사기로 했다.
몇 해전, 느닷없이 여행이 아니라 낯선 도시에서 그냥 술만 잔뜩 마시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애당초 술꾼과는 거리가 멀지만 수년 전부터는 술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여행지에서 친구들에게 꼬박 하룻밤 술값을 내가 계산하고 싶어졌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돈을 쓰며 거들먹거리거나 젠체하고 싶은 것도 전혀 아니다. 딱히 경제적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얼마 되지 않는 오랜 좋은 녀석들에게 그냥 그러고 싶은 마음인 거다.
주당은 아니지만, 술이 좋은 이유를 말하라면 술맛보다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술맛이나 안주를 무시할 순 없지만, 그보다는 함께 술을 마시고 취기가 오른 채 두런두런 잡다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먼저 떠오른다. 함께할 사람이 없다면 술은 더 이상 재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선지 혼술은 거의 하지 않는다.
술은 함께할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막상 마주하고 술을 할 수 있는 이는 손꼽힐 정도다. 나라는 인간의 속성인데, 주변에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므로 아내 혹은 몇몇 친구 외에는 술을 즐길 사람이 마땅히 없다. 아내는 취하도록 마시지 않으니, 실상은 친구 몇몇이 전부인 셈이다.
친한 친구와 술을 마실 때면 마음이 먼저 풀어진다.
술 몇 잔이 들어가면 이내 몸도 마음도 느슨하고 몽롱해지며 주고받는 이야기는 술기운을 타고 멀리멀리 흘러가는데, 바로 이 기분에 술을 마시는 거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취흥(醉興)이다. 술을 마시는 이유는 그러니까 취흥이 좋아서다.
적당한 취기가 오르고 흥이 오르면 마주하는 이와 서로 공명한다. 그 순간만큼은 상대와 내가 하나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간다면… 좋지 않다.
딱 이 정도의 취기가 좋은 줄 알아야 하고, 적당히 흥을 지속해 나가면 된다. 자칫 부어라 마셔라 흥분하면 뒤끝이 좋지 않은 경우가 더러 생긴다. 그러니 술 한 잔을 더 권하기보다는 이쯤에서 끊고 다음을 기약하는 편이 좋다.
그러면 술자리의 기억은 훈훈해지고, 아쉬움에 머지않아 또다시 술과 친구를 찾게 된다.
그러니까 내게 있어 술은 친구로 귀결되고, 함께 나눈 그날의 취흥을 아쉬워하다가 다시, 오래 이어가고픈 도구인 것이다.
처서가 지난 8월의 아침,
역사에서 조용히 버스를 기다리며 아내와 함께할 훗날의 유럽여행과 ‘느린마을막걸리’와 ‘공부가주’ 그리고 ’1865’ 혹은 ’닷사이23‘ 따위를 떠올리다가 다가오는 10월 후쿠오카의 밤을 이리저리 굴려보고 있다.
고속열차가 역사를 빠르게 통과하는지 남은 커피가 가볍게 떨리며 미세한 파장을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