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의 여름

by 난척선생

다시 여름,

서른이 넘고부터는 여름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어린 시절, 계절의 으뜸은 언제나 여름이었다.

유년의 여름을 회상해 보면 '여름방학'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기억 저편에서 달려 나온다.

여름방학이라... 생각하면 절로 미소가 돈다.

여름방학, 느지막이 일어나면 아침을 먹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일단 아이들이 자주 모이던 아파트 공터로 가 아이들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공터에 아무도 없다면 이리저리 아이들을 찾아 어슬렁대다가 집으로 돌아와 숙제나 탐구생활(80년대 초등학교에서는 방학 동안 해야 할 학습과제를 책자로 만들어 나누어주고 방학이 끝나면 담임선생님이 확인을 했는데 그 이름이 탐구생활이었다)을 하거나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면서 아이들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러다가 정 조바심이 나면 만만한 녀석들의 집으로 가 초인종을 눌러 아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불러냈다. 그렇게 두서너 명의 아이들이 모이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놀이가 시작되었고, 동네 아이들은 대부분 삼삼오오 뭉쳐 다니며 여름의 긴 낮시간을 함께 놀았다.

내가 살던 13평 5층짜리 아파트와 그 옆의 작은 공터가 선명하게 밀려온다.

아이들은 아파트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공터 그늘 한 곳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뭘 하고 놀지를 정하거나 잡다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방아깨비, 매미, 잠자리, 호랑나비 등의 곤충을 잡으러 다니기도 했고, 공터에서 야구나 축구를 하거나, 오징어땅콩이나 개뼈다귀 아니면 말 넘기기(비석치기) 등을 하고 놀았다.

날씨가 너무 덥다 싶으면 고무물총(폴리에틸렌 재질의 권총모양으로 된 물총)을 손에 쥐고 마치 서부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쫒고 쫓기며 서로를 향해 물줄기를 뿜어댔다. 결국엔 모두 흠뻑 젖은 생쥐꼴이 됐지만 끈적한 더위를 잠시 잊을 만큼 상쾌했고 시원했다. 다른 계절이라면 옷이며 머리카락이 흠뻑 젖은 채 집으로 들어가면 엄마에게 야단을 맞을 게 뻔했지만 여름이라면 걱정이 없었다. 한두 시간 정도 땡볕을 누비고 다니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게 바싹 말라있었다.

장마철이어도 상관하지 않았다. 비가 어느 정도 그쳤다 싶으면, 아이들은 짝을 지어 길바닥에 버려진 하드(아이스 바) 꼬쟁이(꼬챙이)를 주우러 이 동네 저 동네 쏘다녔다. 하드 꼬쟁이를 모으려면 제법 먼 곳까지 가기도 했는데, 장마철이라 다시 비가 내리는 바람에 옷이 흠뻑 젖기도 했다. 비 맞은 꼴로 두 세명의 초등학생이 길에 버려진 하드 꼬쟁이를 줍고 다니는 모습을 떠올리면 어쩐지 처량한 느낌도 들지만, 그땐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보다 배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앞섰고, 오히려 젖은 꼴로 들어가면 엄마에게 혼날 것이 더 큰 걱정거리였다.

이렇게 주운 꼬챙이가 대략 사십 개 남짓 모이면, 이걸 촘촘하게 밀착시킨 다음 고무밴드로 단단히 엮어 배 모양을 만들어 갔다.

꼬챙이 삼십 여개를 붙여서 만든 몸체의 양 옆으로 두 개의 꼬챙이를 결합하고, 이 두 개를 휘어서 서로 맞물리게 하여 고물줄로 팽팽하게 감으면 제법 그럴싸한 삼각형 뱃머리 모양이 갖추어졌다. 배 뒤쪽도 뱃머리와 마찬가지로 몸체 양 뒤쪽에 두 개의 하드 꼬쟁이를 단단히 고정시키면 선미 중간 부분이 비게 되는데, 그 사이에 고무밴드를 걸어서 고무 동력장치가 되게 했다. 그리고 하드 꼬쟁이를 커터 칼로 2센티 정도의 크기로 잘라 두 개를 만든 뒤, 잘 다듬고 거기에 홈을 파서 십자 모양으로 끼우면 프로펠러가 되었고, 이 프로펠러를 배 뒤쪽에 걸어 둔 고무줄에 걸고 여러 번 감아 돌리면 배을 움직이는 모터가 되었다. 아이들은 비 온 뒤에 생긴 제법 넓고 깊은 물웅덩이로 몰려가 자기가 만든 배를 뛰우고서, 제 것의 모양과 성능을 과시하며 시끌벅적하게 놀았다.

많은 것들이 풍족하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아이들의 놀거리는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여름방학 오전은 언제나 짧았다. 굳이 시계를 보지 않아도 밥때를 알았는데 12시 언저리면 배가 슬슬 고프기 시작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집으로 뿔뿔이 흩어 들어가 점심을 먹었고, 오후 1시가 지나면 다시 눈부신 태양아래로 쏟아져 나와 뭘 하고 놀지를 궁리했다. 두세 명이 모여 있으면 금세 대여섯으로 불어났고, 인원이 늘어날수록 할 수 있는 놀이들이 더 풍성해졌다. 여럿이 웃고 떠들다가도 느닷없이 대거리를 하기도 했고, 아파트 옆동 아들이과 편을 갈라서 놀기도 했다.

그 시절 아이들은 여름처럼 기운이 넘쳐났고, 여름 안에서 쑥쑥 커나갔다. 여름이 익어 갈수록 아이들은 자라고 또 자랐다.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스스로는 몰랐지만 시커멓고 튼튼하게 성장해 있었다.

유년의 여름은 분명 더웠지만, 더운 줄을 모르던 시절이었다.

방학은 친구들과 더 많이 놀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학기 중에도 자주 놀았지만 여름방학은 온종일 놀 수 있는 나날들이었다.

대기는 뜨거웠고 달구어진 지열 속에서 뛰노느라, 오를 때로 오른 체열로 아이들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밝게 웃었고, 덥다 덥다, 하면서도 그늘에 앉아 부채질 몇 십 번이면 덥다는 소리는 이내 사라졌는데, 아마도 함께 노는 재미에 푹 빠져 덥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탓이리라.


신나게 놀다가 지칠 때면 아이들 중 몇몇은 '근대화 연쇄점‘이나 '제일 슈퍼'로 뛰어가 하드(아이스바)나 쭈쭈바를 사 먹을 때도 있었다. 그늘에 앉아 하드나 쭈쭈바를 입에 물고 있으면 차고 달달한 그 맛에 한여름 더위도 녹아드는 듯했다. 그리 넉넉하지 못한 시절이었기에 하드를 먹고 있는 친구에게 '한 번만'이나 '한 입만'을 거리낌 없이 요구했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상대의 요구에 마지못해 응해주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하드가 아까워서 친구에게 베어 물게 하고 싶지 않은 녀석도 있었는데, 그런 녀석들이 쓰는 수법은 하드를 입 안 가득 넣고는 두세 번 빨아서 침을 묻힌 다음 '한 입만'을 요구하는 아이에게 득의양양한 웃음을 띤 채 '자, 이래도 먹을래?'라고 하며 하드를 그 아이 쪽으로 내미는 것이었다. 그러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쓴 표정으로 '더럽다, 더러워'라고 하며 '한 입만'을 포기했다. 아이들 대부분은 나가떨어졌지만 어떤 녀석은 오히려 침이 잔뜩 묻어있는 하드를 보란 듯이 크게 베어 먹어 버리는 녀석도 있었다. 침 묻은 하드를 내밀었던 아이의 어처구니없어하는 얼굴이 점점 화난 표정으로 일그러지면, 그걸 보고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깔깔 웃는 동안에는 더위를 느끼지 못했고, 그 시절 아이들은 자주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이들은 자주 웃었지만 울기도 많이 울었다. 아파트 단지 사이를 엉엉 울며 가던 저학년 아이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그저 친구와 싸움을 했거나 엄마에게 혼났을 거라고 여길 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들이 웃거나 울던 모습은 그만큼 흔한 광경이었고, 어쩌면 지금보다 감성이 풍부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라고 추측해 본다.


마땅한 놀이가 떠오르지 않을 때면 아이들은 아무렇게나 바닥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한 녀석이 '1억만 있으면 평생을 일 하지 않고도 이자만으로도 먹고살 수 있다'라고 하며 당시로서는 가늠할 수 없이 큰돈, 1억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표현하기도 했고,

그 시절엔 영화관에서만 볼 수 있었던, 그래서 아이들 대부분이 보지 못한 채 소문만 무성했던, 스타워즈나 007 시리즈(미성년자 관람불가였다), 혹은 슈퍼맨이나 터미네이터, ET, 고스터 버스터즈 같은 영화 이야기를 하기도 했으며,

당시 대히트를 쳤던 미국 시리즈 5부작 'V'의 캐릭터 다이에나가 살아 있는 쥐를 삼키는 장면에서, 배우가 실제로 쥐를 먹었다고 주장하는 억측과 반발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고,

'이건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고 호언장담을 하며, 물론 그럴 리가 없었지만, 당시 아이들에게 퍼져있던 으스스한 학교괴담들을 하나씩 풀어놓기도 했고,

외화 시리즈나 영화를 통해서나 어렴풋이 알 수 있던, 잘 사는 나라의 표본인 미국이나 80년대 당시 경제 최강이었던 이웃나라 일본에 관한 확실치 않은 소문들을, 마치 실제 가서 본 것처럼 서로에게 주장을 해대곤 했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바로 진실여부를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시절은 출처와 진실여부를 알 수 없는 정보들이 마구 떠돌아다녔다.

그렇게 참새처럼 재잘거리다 보면 어느새 해가 느긋하게 기울어가고 뜨거웠던 여름의 하루가 조금씩 식어가는 것이었다.

유년의 여름을 돌아보면, 더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덥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지 않은, 노는 재미에 푹 빠져든 채, 영혼이 맑고 자유롭던 계절이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광합성으로 무럭무럭 자라는 식물처럼 유년의 여름은 강인한 생명의 계절로 기억된다.

태양은 뜨겁고 소낙비는 쏟아지고, 이를 자양분으로 식물들은 그 줄기와 잎을 무섭게 확장해 나갔으며, 곤충들도 펄펄 날아올랐다.

그리고 아이들은 언제나 시끌벅적하게 따가운 햇살을 가로세로 뛰어다녔다.

당시엔 알 수 없지만, 되돌아보면 스르르 알게 되는 것들이 더러 있는데, 유년의 여름방학이 그러하다.

유년시절을 회상하다가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느낌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면, 아이였던 그 시절의 맑은 웃음이 입가에 도는데, 이 기분이 풋풋하여 은근히 좋다.


어린 시절 여름의 빛깔은 눈이 아리도록 쏟아져 내리던 뙤약볕의 투명한 하얀색과 언제나 주변에서 지천으로 볼 수 있는 식물들의 진녹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온 세상에 부서져 내리던 새하얀 햇빛과 짙은 녹색이 깔린 세상을, 거무튀튀한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질주했다. 아이들의 피부는 햇볕에 그을려 대부분 시커멓게 타 있었고, 팔뚝과 목뒤로 일광화상으로 인해 껍질이 벗겨져 있는 경우가 흔했다.

여름 풍경의 주인공은 아이들이었고, 내 기억에서 아이들은 언제나 떼를 지어 시끌벅적 달리고 있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 모든 생명들이 역동하고 있었다. 하루하루 녹음을 더해가는 풀과 나무들, 풀숲 여기저기서 날고뛰던 곤충들, 서로 한껏 톤을 높여 재잘대던 아이들의 생명력은 여름을 그대로 관통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40년이 훌쩍 지나, 여기 쉰을 넘긴 중년의 사내가 있다.

그는 지금 7월 뜨거운 햇살이 내리 꽂히는 아파트 단지에 엉거주춤하게 서있다.

그에게 여름이라는 계절은 더 이상 방학이나 휴가의 계절이 아니며, 자유나 역동 혹은 생명의 계절이 아니다.

이제 여름은 그저 쏟아지는 햇살을 피해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건물로 허겁지겁 숨어들어야만 할 계절이 되어버렸다.

아쉽지만 여름은 돌파해야 할 계절이 아닌, 되도록 피해야만 하는 계절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잠시 뜨거운 여름 안에 덩그러니 선 채 어리둥절하다.

그는 지금 피할 수도 없는 여름을 피하려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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