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스러운 시간을 소망합니다.
제게 있어 그런 시간이란, 편안한 마음으로 원하던 걸 슬렁슬렁하거나 소중한 사람과 넉넉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미지가 그려집니다. 예를 들면 이런 풍경들이죠.
#발리나 보홀 같은 휴양지의 고급 리조트군요.
오전 11시경, 파란 하늘에 볕은 쨍하지만 기온은 26도 정도로 적당합니다. 수영을 하다가 조금 지루하다 싶으면 풀에서 나와 커다란 타올로 물기를 닦아내고, 수영장 한쪽에 놓인 선베드에 눕는 거죠. 손을 뻗어 테이블에 놓인 마이클 온타치의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집어 듭니다. 파란 수영장 바닥으로 햇빛이 그대로 투과되어 물결의 투명한 그림자가 다이아몬드 문양으로 일렁이고 있는 걸 보니 눈이 부시고 어지럽습니다. 얼른 헤어라인에 걸쳐있는 선글라스를 내려씁니다.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고 있으니 어쩐지 시간이 더디게 흐르고 슬그머니 졸음도 찾아듭니다. 슬슬 배가 고파지면 바로 옆에 있는 바에서 하와이안 피자와 '산 미구엘'이나 '빈땅' 맥주를 주문하는 거죠. 시원한 맥주와 피자의 조합이 좋군요.
맥주 한 잔이면 취기가 살짝 올라옵니다. 자, 이제 다시 풀에 들어가 느긋한 수영을 즐길 시간이군요.
#자주 가는 카페이거나 집 앞 도서관입니다.
백팩에서 책 두 권과 이어폰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둡니다. 이어폰을 케이스에서 꺼내 귀에 꽂자 간결하고 산뜻한 연결음이 들리며 스마트 폰과 페어링 됩니다. 저는 이 연결음이 좋습니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들리는 멜로디 같다고나 할까요.
스마트 폰 화면 하단의 흰색바탕에 초록색 원이 섞여 있는 '멜론' 아이콘을 가볍게 터치한 다음, 플레이리스트에서 어떤 곡들이 좋을지, 잠시 머뭇거립니다. 음... 오늘은... '연주곡'이 좋겠군요. 연주곡이라고 표기된 폴더에서 셔플 재생 버튼을 누르자, 귀에 익은 멜로디가 귓속 가득 채워집니다.
첫 번째 곡이 끝나고 이내 더 친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옵니다. 가벼운 리듬에 몸과 마음을 실은 채, 살랑살랑 그루브를 타는 거죠.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군요. 얼굴에서 미끄러지듯 미소가 퍼져 나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아, 맞다! 여기에 고소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 더해지면 더할 나위 없겠죠.
이제 슬며시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여행 에세이나 장자에 관한 책을 펼쳐봅니다.
차근차근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가끔씩 가슴이 출렁거리는 문장과 조우하게 되는 때가 있죠. 그럴 때면 내 안에선 어떤 희열 같은 것이 빠작거립니다. 머리로는 폴폴 날리고 있는 생각들을 이리저리 굴려 보게 되죠.
시간이 끊긴 듯, 음악이 멈춘 듯, 고요하고 또 고요한 순간이죠.
#아내와 긴 유럽여행을 하는 중입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서 이틀 동안 와이너리 투어를 한 뒤, 오늘은 남부의 아말피 해안을 드라이브하고 있습니다. 한참을 운전을 하다 보니, 문득 길게 펼쳐진 코발트빛 지중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드네요.
구불구불 이어지는 해안 절벽의 환상적인 풍경에 넋을 잃고 넋을 잃고 잠시 차를 세웁니다. 아내는 웃음 그득한 얼굴로 지중해를 바라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고 있군요.
갯내음에 레몬향이 살짝 얹어진 바람이 시원하고 상큼하게 느껴집니다. 그때 갑자기 돌풍이 불고, 아내가 쓴 하얀 플로피 모자가 벗겨져 제 쪽으로 날려옵니다. 모자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저는 잽싸게 그걸 잡아 내죠. 아내의 당황스러운 표정이 곧바로 안도와 유쾌한 웃음으로 뒤바뀌는군요. 아내의 환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저 역시 행복감이 밀려듭니다. 나도 모르게 ‘이런 게 여행의 맛이지’라고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다정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근처 카페에서 커피나 마시자고 말합니다. 아내는 소녀 같은 표정을 띤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내의 얼굴에서 행복을 읽어 낼 수 있군요.
#햇살이 따듯한 5월 초순의 수요일이고, 연차 휴가입니다.
오전엔 도서관에서 이어폰을 꽂고 바흐를 들으며 어제 읽다만 거시경제 흐름에 관한 책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점심은 아내와 자주 가는 냉면집에서 육회 비빔밥을 먹고 왔고요. 그리고 거실 소파에 누운 채 넷플릭스에서 빔 벤더스의 '퍼팩트 데이즈'를 다시 보았습니다. 좋은 영화는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군요. 시계를 보니 3시가 조금 넘었네요.
수영가방을 챙겨 들고 느긋하게 스포츠센터로 향합니다. 집 앞 공원의 이팝나무 꽃이 하얗게 도드라져 있군요.
'이팝나무 꽃은 정말 하얀 쌀밥 같은 느낌이야.'라고 중얼거려 봅니다.(이팝나무는 쌀밥을 뜻하는 이밥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팝나무로 불리고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
주중 수영장의 오후 3시에서 6시는 한산합니다. 느긋한 마음으로 수영을 하기엔 이 시간이 딱 좋죠.
2100미터를 쉬지 않고 수영을 하고 나니 전신에 힘이 쭉 빠집니다. 집으로 곧장 갈까 하다가, 오늘도 수영 후에 매번 들르고 있는 단골 국수가게로 향합니다. 10년이 넘도록 이 가게를 찾다 보니, 사장님은 문을 열자마자 반갑게 알은체를 합니다.
"어서 오세요. 멸치국수 맞죠? 근데 아들은 요즘 잘 안 보이네요?"
"이제 고3이라, 수영장을 자주 못 올 것 같네요."
국수는 주문과 동시에 만들어지고, 5분이면 고명으로 올라간 부추와 양파, 당근에 참깨가루가 소복이 뿌려진 정갈한 멸치국수가 완성이 됩니다. 후루룩 후루룩 젓가락질 몇 번에 금세 바닥이 보입니다.
'음... 역시 맛있어. 이 집은 매번 먹을 때마다 맛있어. 맛이 사장님 얼굴처럼 깔끔해. 이렇게 질리지 않는 가게는 잘 없지. 자기만 알고 있는 단골가게 몇 군데가 있다는 건, 어쩌면 행복한 사람이라는 뜻일지도 몰라.'
국숫집을 나오니 서녘하늘엔 오렌지와 핑크빛이 뒤섞인 멋진 석양이 물들어 있네요.
휙 하고 바람 한줄기가 귓가를 훑고 지나갑니다. 덜 마른 머리카락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어 청량감을 주네요.
'아! 오늘도 그럭저럭한 하루가 지났군! 별 다를 건 없지만 그래도 여유 있고 그럴싸한 휴가였어. 훗훗, 생각하면 다행한 일이지.'
#12월이 되자 문득 과메기 생각이 나는군요. 12월 하면 과메기죠. ㅎㅎ
친구에게 술 한잔 하자고 전화를 걸어봅니다. 과메기를 좋아하는 친구는 흔쾌히 제안을 수락합니다.
몇 시간 뒤, 근처 술집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물론 안주는 과메기고요.
테이블엔 어슷어슷 썰어낸 과메기와 구운 김, 돌미역, 그리고 마늘종, 오이, 당근, 깻잎, 배추 등의 채소들이 대나무 소쿠리에 가지런하게 올려져 있군요. 배추쌈 위에 초장을 찍은 과메기와 돌미역, 마늘종을 함께 올려서 입으로 가져갑니다. 달큼한 배추와 알싸한 마늘종, 그리고 비릿하고 향긋한 미역이 꾸덕한 과메기의 식감과 뒤섞여 기가 막히게 어우러집니다. 우적우적 씹는 맛이 일품이군요.
아참! 술을 빼놓을 순 없죠. 음... 여기엔 소주나 막걸리가 어울릴 것 같군요. 노르스름한 양은 막걸리잔을 부딪치며 서로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중년 남자들의 수다 타임.
아!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고 기분이 밝아집니다.
이럴 것이 아니라, 정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봐야겠습니다. 12월은 역시 과메기니까요.
'사치'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필요 이상의 돈이나 물건을 쓰거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함'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저는 사치를 부리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사치의 시간'은 자주 그리고 꽤 오래, 누리고 싶습니다.
사실 분에 넘치게 쓸 돈도, 쓸 마음도 없지만, 분에 넘치는 시간을 누릴 수는 있을 것만 같군요.
큰 부자가 되어 마음껏 자본주의를 누리는 사람이 되고는 싶습니다만, 쉽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부지런히 배우고, 노력하고, 깨친다면, 넉넉함을 간직한 채 한 세상을 살다 갈 수는 있다고 믿어봅니다.
뭐, 여유로운 삶과 죽음이라고 해두죠.
그러자면 몇몇 요소의 조화로움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군요.
먼저 건강한 몸,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뭐니 뭐니 해도 머니(money)죠. 또한 내 곁의 소중한 몇몇 사람들,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마음가짐일 것 같군요.
이러한 요소들이 조화롭게 형성되어 있을 때, 비로소 넉넉함으로 삶을 살다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 돈, 사람, 그리고 마음가짐에 대한 포트폴리오를 잘 배분해야 할 것 같군요.
전보다 단순하고, 넉넉하고, 조화롭게 말이죠.
아무튼 저만의 사치를 누리는 이런 상상만으로도 행복감이 살랑살랑 밀려듭니다.
뭐, 사는 게 별 건가요. 바로 이런 거죠. 훗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