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삶에 대하여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칼럼 연재를 하기에 앞서.
본 이야기는 교보문고 글쓰기 플랫폼 '창작의 날씨'에 자문위원이자 멘토 작가로서 올린 칼럼입니다.
최근 교보문고 창작의 날씨에 이어 교보문고 스토리 사이트와 공모전도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 명맥은 교보문고 출판브랜드 '북다'가 종이책을 중심으로 이어가게 되었는데요.
오랜 시간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작가로서 아쉽지만,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앞으로 공모전 심사위원으로서 느꼈던 소회나, 심사 기준, 그리고 어떤 작품들이 눈에 띄었는지, 따로 글을 남기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교보문고 '창작의 날씨'에 올린, 예비 작가분들을 위한 칼럼을 연재하고자 합니다. 연재랄 것도 없이, 총 5편인데요. 틈틈이 올려보겠습니다^^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1)
나는 어릴 때부터 공상하기를 좋아했다. 딱지치기나 공놀이를 하기보다 혼자 멍하니 앉아 엉뚱한 상상을 하거나, 다른 동네의 골목골목을 해종일 누빌 때가 많았다.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거나, 하다못해 벽에 낙서할 때도 그냥 하지 않고 늘 특정 상황을 설정해주곤 했다.
“술래는 이제 막 지구에 도착한 외계인이고, 우리는 그걸 추적하는 지구방위사령대야! 지구를 지켜야 해!”
“우리는 지금 골목길이 아니고, 미지의 대륙을 탐험하는 중이야! 다 돌아보고 지도를 만들자!”
“이 벽에 문을 그리면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만든 새로운 룰(rule) 속에서, 친구들에게 롤(role)을 부여하며 같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게 좋았다.
우리는 창신동의 성곽 지붕을 내달리며 조선 시대로 시간여행을 하거나, 왜군들과 총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지금은 성곽길이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지만, 당시 서울 낙산에는 철조망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친구들과 나는 철조망 밑에 개구멍을 파서 몰래 성터에 드나들었다. 풀숲이 드리워진 성터의 곳곳에는 우리만의 아지트가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날마다 새로운 공상에 빠져들었고, 새로운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어 해가 질 때까지 뛰어다녔다.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수시로 떠오르는 다양한 상상들을 일기장에 적기 시작했다.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대화와 묘사를 곁들여 서술하다가도, 어떤 날에는 약간의 상상을 가미하기도 했다. 선생님들은 그런 내 일기를 좋아했고, 자신감이 붙은 나는 백일장에 나가서 상을 타올 때가 많았다. 나는 공부보다도 책 보기를 좋아했고, 일찌감치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할까?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과, 직업으로서 작가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어찌어찌 대학도 국문과에 들어갔지만, 그래서 더 나는 현실 앞에 절망해야 했다. 당연히 부모님은 내가 졸업 후 취업하거나 장사를 해서 빨리 돈을 벌기를 원했다. 명절 때마다 친척들은 내가 어느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는지 궁금해했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작가의 꿈을 고수하기가 어려웠다. 나 또한 과연 내가 작가로서 살아갈 수 있을지 스스로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 작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습작생들의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거대한 벽 앞에 홀로 서 있는 기분. 소설을 쓸 때는 분명 저 벽 어딘가에 ‘9와 3/4 승강장’이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 앞에서 벽은 어디까지나 ‘완벽한 벽’일 뿐이었다. 도저히 뚫고 나갈 틈이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서, 나는 이제 소설 대신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력서를 쓰면 쓸수록 더욱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집안 형편이 어렵다 보니 글쓰기에 전념하고 싶다는 얘기를 꺼낼 수도 없었다. 친구들은 취업이 안 되더라도 도서관에 다니며 스펙 쌓기에 골몰했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노트북에 시나 소설을 끼적일 때가 많았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그 흔한 토익 점수마저 없었으니 취업은 점점 요원해져 갔다.
“너는 왜 다른 애들과 다르니?”
어머니는 작가의 꿈을 가진 나를 안타까워했다. 나 역시 부모님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나마 틈틈이 논술학원 강사나 방송국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보탰기에 겨우 버틸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버텼고, 또 버텨야 했다. 서른이 되기까지 버티기도 힘들었는데, 이후로 작가가 되고 어찌어찌 입에 풀칠하기까지 또다시 장장 10년이 걸렸다. 다행스럽게도 중간에 시로 먼저 등단하고, 청소년 소설을 출간하면서 작가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지만, 막상 작가가 되는 것과 먹고사는 일은 전혀 별개였다.
버티는 삶에 대하여
지금 작가의 꿈을 가진 후배들을 만나거나, 그들이 내게 고민을 토로할 때면 종종 이렇게 되묻곤 한다.
“지금 버틸 만하니? 그리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니?”
만약 작가의 꿈을 가진 채 ‘버티는 삶’을 그럭저럭 유지할 수 있다면, 그리고 버티면서 습작하는 일상이 그럭저럭 괜찮다면 나는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지금의 이 시간이 너무도 버겁고, 조금이라도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당장 포기하는 게 좋다고 말한다. 결국 작가가 되더라도 ‘버티는 삶’은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지금 동료 작가들을 보더라도, 사실상 등단 초기 주목을 받았던 이들 중 지금까지 계속 글을 쓰는 이들은 별로 없다. 생계를 이어가며 작품을 꾸준히 써내기도 어렵거니와, 오히려 주목을 받았던 기억 때문에 이후에 작품집을 냈을 때 인기를 끌지 못해 절망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작가가 되고 아예 주목받지 못하거나 책이 팔리지 않더라도, 그러거나 말거나 꾸준히 글을 써나가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이미 오랜 습작 생활을 통해 글과 삶을 병행하는 법을 익혔으며, 글쓰기 자체가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한 일인지를 체득하고 있다. 또 특출 난 재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야기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들은 이번 작품이 주목을 받거나 말거나 다음 작품을 또 써내고, 다음 작품이 팔리지 않더라도 그다음 작품을 써나간다. 그들은 작가로 사는 자체로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알며, 또 작가로 살아낼 줄을 안다.
그들 중 몇몇은 이미 수십 권의 책을 내서 인세만으로도 충분히 생계를 꾸릴 수 있게 되었고, 또 몇몇은 강연이 몰리면서 전국 곳곳을 누비고 있다. 몇몇은 영화나 드라마, 웹소설로 영역을 넓혀 스토리텔러로서 승승장구하고 있고, 몇몇은 오랜 출판 경험을 살려 직접 출판사를 차려 안정적으로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이쯤 되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치채지 않았을까?
그렇다. 작가가 되기보다 중요한 것은 ‘버티는 능력’이다. 지금 내가 습작하는 삶을 버틸 만하다면, 그러면서 계속 소설을 써나갈 수 있다면, 그는 습작하면서 버틴 시간이 길면 길수록 작가가 되었을 때 오래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 자신을 담금질하면서 버텨온 사람들은 글쓰기를 계속해나가는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안다. 오랜 세월, 글과 생활을 병행하면서 버텨왔기에,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계속 다음 책, 또 다음 책을 써나갈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빛을 발하는 책을 쓰게 될 것이다. 빛을 발하지 못하면 또 어떤가? 어떤 책은 반드시 어떤 독자에게 감동을 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의 삶을 바꿔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글을 쓴다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언제까지고 버티면서 써볼 만하지 않을까?
나는 어느새 마흔넷의 중견작가가 되었지만, 사실 내 이름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러나 나는 별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도 없고, 내 책이 대박 나기를 바라는 마음도 적은 편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다. 바로 다음 이야기를 쓸 수 없게 되는 것, 다음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 것, 그것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할까? 여전히 나는 백지 앞에서 공상하면서 숨바꼭질을 하고, 탐험하거나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 때로는 아이들처럼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벽을 밀어서 다른 세계로 넘어간다. 작가는 언제까지나 놀이를 즐기는 어린아이이며, 그러면서도 한 세계를 빚어내는 창조자이다.
충분히 버텨볼 만하지 않은가? 다시 말하지만 오래 버티면 버틸수록,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당신은 작가로서 오래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오래 생존하면 할수록 더 멋진 작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결코 지금 이 순간을 비관하지 말자. 적어도 당신이 계속 습작을 이어가는 한, 당신도 창조주인 건 마찬가지니까.
- 2022년 교보문고 창작의 날씨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