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못생겼다고 욕먹던 철제 괴물

지금은 세계의 아이콘

by 에투왈
* 샤오궁 동쪽날개와 에펠탑, 2025.4월, 전성일(에투왈)



14년 만에 다시 마주한 에펠탑.

그땐 12월의 겨울이었고, 에펠탑은 더 쓸쓸하고 멜랑꼴리 하게 보였다. 그런데 그래서였을까, 오히려 더 로맨틱했다.

마치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라는 말이 이 풍경을 위해 태어난 듯했다.

그 낭만적인 풍경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다시 빠리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 샤요궁, 트로카데로 광장


그런데, 이 로맨틱한 철탑이 처음부터 찬사를 받은 건 아니었다.

1889년,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박람회에 세워진 에펠탑은 당시 빠리 시민들에게 ‘철제 흉물’이라는 욕을 실컷 먹었다.


1887년 2월 14일, 에펠탑 건설이 시작되었다. 당시 유명 잡지였던 르 탕(Le Temps) 1면에는 "에펠탑 건설에 반대하는 예술가들의 항의"라는 기사가 실렸다. 40여 명의 서명자 중에는 작곡가 샤를 구노, 작가 기 드 모파상과 알렉상드르 뒤마의 아들, 시인 프랑수아 코페, 심지어 오페라 건축가 샤를 가르니에까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 있던 빠리의 아름다움'을 옹호하는 우리는 수도 한복판에 쓸모없고 기괴한 에펠탑이 세워지는 것에 반대한다."

민심은 이미 이 탑을 바벨탑이라고 불렀다.


* 샤오궁에서 본 에펠탑, 2025.4월, 전성일(에투왈)


문호 기 드 모파상은 에펠탑을 "빠리에서 가장 보기 싫은 것"이라며 혐오했다. 그런데 그는 매일 점심을 에펠탑 꼭대기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빠리에서 유일하게 에펠탑이 안 보이는 곳이니까."

프랑스 정부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았다. 귀스타브 에펠은 빠리시와 협정을 맺었다. 건설 비용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보조금을 받았고 나머지는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스스로 자금을 마련했다. 대신 20년 동안 에펠탑 운영권을 보장받았다. 그렇게 이 탑은 박람회가 끝나도 철거되지 않고 20년을 더 살아남게 되었다.



에펠탑 꼭대기에 아파트가 있다?


* 에펠탑 아파트 안에 있는 밀랍인형(에펠과 에디슨)


1889년 9월, 빠리에서는 만국 박람회가 한창이었고, 귀스타브 에펠은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의 탑은 박람회의 주인공이며, 매일 수천 명의 방문객이 906피트(약 272미터) 높이에 처음 오르는 흥분의 전율을 느끼기 위해 줄을 섰다.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은, 바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이 매혹적인 탑을 직접 방문하고 그 탑을 지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넜다.


에디슨은 빠리 만국 박람회에 참석하여 자신의 발명품인 축음기를 선보였습니다. 에디슨의 축음기는 소리를 녹음하고 재생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기기였다.


구스타프 에펠은 탑 꼭대기 플랫폼 위층에 있는 아파트를 자신만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아래층은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이런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빠리 상류사회는 이곳에서 투숙하기 위해 에펠에게 많은 제안을 했다. 하지만 에펠은 이를 모두 거절하고 토마스 에디슨 같은 저명인사만을 구름 속 그의 아파트에 맞이했다.


* 에펠탑 정원에서, 2025.4월, 전성일(에투왈)



에펠탑, 해체 위기에서 살아남은 이유, 예술이 아닌 과학이었다!


약속된 20년이 지나고 1909년.

드디어 ‘철거의 시간’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 사이 에펠탑 꼭대기에 무선 전신 송수신 안테나가 설치되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군사 통신의 핵심 거점이 된 덕분에, ‘쓸모 있는 흉물’로 급부상. 덕분에 철거를 면하고 오늘날까지 살아남게 된 것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철제 괴물은, 지금은 ‘로맨스의 정점’으로 사랑받고 있다.

지금 모파상이 에펠탑을 봤으면 뭐라고 했을까? 궁금하다.


만약 에펠탑이 없다면 지금의 빠리는 어떨까?

수 믾은 연인과 낭만이 살라졌을 그 일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다.



히틀러에 의해 파괴될 뻔했다?




1944.8월 히틀러는 연합군에 의해 후퇴하면서, 파리와 에펠탑을 파괴할 것을 명령했다.


8월 23일, 히틀러는 전보로 도시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파리는 폐허가 된 들판이 아닌 이상 적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 Paris darf nicht oder nur als Trümmerfeld in die Hand des Feindes fallen" )

다양한 다리와 기념물에 폭발물이 설치되었다.


* 디트리히 폰 콜티츠 독일 장군


그러나 다음날 24일 새벽 연합군이 도시 외곽에 도착하자 콜티츠는 도시를 파괴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8월 25일 독일 수비대를 연합군 최고 사령부가 아닌 임시 정부인 자유 프랑스 대표에게 항복했다.


히틀러의 지시가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콜티츠는 종종 "파리의 구세주"로 여겨진다.



〈인셉션〉도 반한 명당, 영화보다 영화 같은 순간


저녁이 되자 지친 다리를 이끌고 가장 가까운 샌드위치 가게로 향했다.

운 좋게도 사람이 별로 없고 날씨까지 좋아 야외 탁자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빠리의 카페나 레스토랑은 차도에 까지 데크를 설치하고 그 위에 식탁이 놓여 있다. 여기가 빠리라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다.

환경과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길 위의 식탁’이 허용되고, 그게 또 낭만이 된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의 하이라이트.




*인셉션 영화 속 비르하켐 다리 장면


* 비르하켐 다리 위에서 1, 2025.4월, 전성일(에투왈)


센강 위로 낭만이 흐르는 비르하켐 다리(Pont de Bir-Hakeim)로 향했다.

바로 그 영화 〈인셉션〉에서 디카프리오와 마리옹 꼬띠아르가 등장했던 장면.

그 유명한 아치형 다리 아래, 나도 디카프리오처럼 포즈를 취해본다.

물론 마음만 디카프리오였다.


* 비르하켐 다리 위에서 2, 2025.4월, 전성일(에투왈)


* 비르하켐 다리 위에서 3, 2025.4월, 전성일(에투왈)


다리 위에서 바라본 에펠탑은, 말 그대로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마침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고, 강 건너로 반짝이기 시작하는 철탑이 보였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에투왈 개선문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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