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것을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신이 존재한다면 자연의 법칙 그 자체가 신이 아닐까?
나의 이 사소한 물음에서 오늘의 글을 시작해보자.
현대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세상을 설명하고자하는 영역이 하나씩 풀어지고 있다. 뉴턴의 물리학은 대부분의 운동을 설명한다. 뉴턴의 물리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미시적인 세계는 양자역학이론이, 거시적인 세게는 일반상대성이론이 세상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과학이 더욱 더 발전함에 따라 과거에는 아예 다른 부류로 여겨진 종교, 신, 의식의 영역 또한 과학적으로 접근하고자하는 움직임이 보이는 것 같다.
나는 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과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이 흥미롭다.
그렇다면 종교, 신, 의식을 현대과학은 어떻게 다루고자하는지, 그리고 이와 관련된 견해에 대해 알아보자.
현대과학이 어떻게 이를 다루는 지를 알기 전에, 이를 과학의 가설들을 전제로 하는 철학적인 세계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어떤 철학적인 세계관을 기저로 과학이 발전했는지에 따라, 종교, 신, 의식을 해거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프의 책, 갈릴레오의 오류: 새로운 의식의 과학을 위한 기초 에 따르면 갈릴레오식 과학의 패러다임은 수학이라는 언어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가 과학의 세계라 규명한다. 이러한 정량적인 해석은 우리에게 매우 직관적으로 세계를 잘 해석해 나간다. 하지만 의식과 물질의 본질 자체까지 해석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사과가 빨간색으로 인식되는 과정은 해석할 수 있더라도, 왜 사과가 빨간색인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갈릴레오는 이러한 문제를 영혼을 도입하여 해결하였다. 사과가 빨간색인 것이 아니라, 영혼에서 이를 빨간색으로 취급하였다는 방식이다. 이처럼 과학과 의식을 구분한 접근방식은 의식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의식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하다. 이 중 새롭게 제시되는 패러다임으로 범심론과 범신론이 있다. 이 두 가지 사상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범신론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주, 세계, 자연, 인간의 모든 것이 신이다.'
자연을 신이라 섬기는 애니미즘 사상, 인도의 우파샤드 사상, 사람이 곧 하늘인 동학의 인내천 사상,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 사상등이 범신론의 성격을 띠고 있다. 범신론을 잘 나타내는 영상이자 단편소설인 The Egg을 보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짧아서 보는거 추천) The egg에서는 세상의 모든 존재가 과거 나였으며, 현재의 나이며, 미래의 나 라고 말한다. 더나아가 범신론적 관점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만물이 곧 하나이며, 현재의 나는 잠시 떨어져나간 존재 또는 이 또한 떨어져 나간 존재라는 환상으로 바라본다. 다음 영상에서 범신론을 쉽게 비유한 구절이 있다.
생명체는 거대한 하나의 바다에서 잠시 떨어져 나온 물 한방울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죽으면 다시 바다로 돌아와서 하나가 된다.
마치 윤회 사상이 떠오르는 구절이다. 이러한 범신론은 과거에 존재하였으나, 인간중심적인 다른 종교관의 대두로 인해 무시받아져 왔다.
범심론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
범심론에 따르면 인간만이 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것처럼 뇌가 의식을 개별적으로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의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는 다른 사람이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넘어서 다른 동물은 물론이고 심지어 무생물까지 의식을 가지고 있다 말한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자나 쿼크 같이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 또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나는 내가 느끼고 있는 경험 자체로 의식을 인지할 수 있지만, 입자가 의식이 있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 범심론은 입자는 단순한 형태의 경험을 할 것이고, 이러한 단순한 의식형태에 의거하여 우리의 뇌와 같은 복잡한 의식을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바라본다. (참고: 범심론과 어려운문제) 이러한 범심론적의 가설적인 측면은 물질의 외부를 묘사하는 물리학과 달리 물질을 안에서 부터 바라보고, 기존의 방식이 해결하지 못한 데이비드 차머스의 '의식의 어려운문제'를 접근하는데 방법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이제 왜 이러한 낡았던 패러다임을 현대과학은 왜 다시 재조명하는지 알아보자.
여기서부터는 범신론과 범심론을 바라보는 주관적인 나의 해석이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냥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단순히 글의 첫번째 질문에 대한 관점을 정리하는 것뿐이다.
현대과학과 범신론과 범심론이 양립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범신론과 범심론은 이어져있다는 것을 이해하자. (실제로는 부분적으로 연결되어있는 것으로 본다고 한다.)
범신론적 관점에서는 만물이 곧 하나이며, 현재의 나는 잠시 떨어져나간 존재로 본다고 했다. 범심론적 관점에서는 만물이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즉 만물이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곧 하나의 의식으로 이어지며, 현재의 나는 커다란 의식 중 떨어져 나간 의식의 형태라고 해석할 수 있다. 난해한 문장이지만 단순히 '신' 대신 '의식' 이라는 표현을 넣으면 된다. 범신론의 비유를 가져오자면, 바다 그 자체가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예시를 들어 설명해보자. 의식을 내가 느끼는 경험이라고 정의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현실세계 사이에서 어느정도를 나까지라고 의식하는가? 흔히 팔, 다리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다른 경험들을 해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장기의 운동을 의식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습관적인 행동들 또한 의식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팔 다리보다는 더 작은 범위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놓고 집을 나가면 팔을 잃은 느낌이 든다. 누구는 먼 거리의 예지몽을 꾸기도 한다. 이러한 부분은 팔 다리보다 더 큰 범위 일 수도 있다.
만약에 뇌에서 의식을 만드는 것이라고 반론한다면 이는 다음과 예시를 들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걸어다니면서, 핸드폰 통화를 한다. 뇌는 이때 크게 청각정보(통화)와 운동기관(걷기)를 처리할 것이다. 하지만 이 때, 내가 실제로 의식하고 있는 부분은 전화통화 내용이다. 걸어다니는 메커니즘이 아무리 복잡하다 하더라도 이는 내게 의식적으로 다가와지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에 걷다가 돌뿌리에 넘어질 뻔하거나, 피해야될 장애물이 생겨났다고 하자. 그럼 우리는 순간적으로 무게중심을 바꿔 균형을 잡을 것이고 그 순간의 통화내용은 의식의 차순위로 밀려나갈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서 보았을 떄, 우리 뇌에서도 각각의 의식이 담당하고 있을 거지만 우리가 실제로 느끼고 있는 경험하는 부분인 '의식'은 뇌 부분마다 다를 수 있다.
즉 나의 의식은 현재 겪고 있는 경험에서 비롯하여 내것이라고 느껴지는 것뿐, 내 속에서의 어느정도의 범위가 나의 의식이라고 정의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마치 바다에서 한방울의 물이 떨어져나간 것처럼, 우리는 개별적인 의식(한방울)의 의식으로 느낄 뿐 결국 바다로 돌아갈 것이라는 측면이다.
현대과학은 어떻게 이러한 가설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일까?
이 파트는 증명이 안되었기 때문에 논리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가 아니다는 말이 있듯이 이러한 접근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자.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관찰자의 인식에 따라 결과가 정해진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쿼크가 관찰됨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쿼크가 의식적으로 행동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의식의 작용을 인지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입자가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양자는 측정되기 전까지 여러 확률상태로 존재하는 양자중첩 상태를 띨 수 있다. 이러한 중첩 상태 자체가 의식 상태를 표현하다고도 바라본다.
범신론, 범심론은 논란이 많고,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 그럼에도 의식과 세계에 대한 매우 흥미롭고 급진적인 세계관을 그려준다. 이러한 급진적인 견해와 현대과학의 관계는 계속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영감과 더 깊게 연구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도 흥미로워서 한 번 찾아서 써보았다.
최근에 제시된 통합정보이론(IIT)라는 이론은 이러한 가설을 과학적으로 접근한다. 이는 의식을 하나의 환원 불가능한 완전체로 이해한다. 이러한 접근 범심론적 가설과 양립한다.
물론 의식을 해석하는 관점은 아직 정립되지 않았으며 다양하다. 대니얼 데닛은 의식을 환상이라고 말한다. 통합정보이론는 의식을 정보 인과관계 그 자체로 본다. 양자역학적 해석으로 바라보는 과학자도 존재한다.
이러한 관점은 세상 자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열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축사인 허준이 축사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이를 범신론적 관점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절을 범신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나 자신에 대한 이기심 또한 사라진다. 나 자신이 곧 타인이고 타인이 곧 나이며,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면, 모든 존재에게 더 따뜻하게 대해도 되지 않을까? 과학에서 시작된 범신론과 범심론적 관점에서 배울 수 있는 마음가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