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secroibeau라는 것을 hessecabeau와 같이 써야한다. 그것[hessecabeau = escabeau]가 없다면 hihanappat qui soit ding! d’nom dhom. LOM은 서로 투쟁하여 자신을 lomellise인간화]한다. 무언가가 LOM에게 말한다 : 젖어라!(가라!) -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 왜냐하면, 젖지 않고서 hessecabeau [escabeau]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2번째 문단의 마지막 부분을 시작하겠습니다.
Hissecroibeau.
이 말은 앞서 나온 beau(아름다움)에서 파생된 것으로, 다시금 il se croit beau와 동음이의어가 됩니다. 말하자면 Hissecroibeau는 “그는 자신을 미남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의미와 동음이의어이지요.
동음이의어를 통해서 라깡은 사튀로스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튀로스는 술의 신인 디오뉘소스를 추종하며, 반은 인간이며 반은 짐승인 종족이지요.
사튀로스는 충동적이며, 항상 발기되어 있는 성욕의 상징입니다.
인간은 성충동의 존재입니다. 단순히 인간이 항상 발정이 나있다거나, 항상 섹스에 굶주려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자연을 거스른다는 뜻입니다.
동물은 자연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동물은 주어진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갑니다. 동물은 주어진 동굴에 들어가 살며, 주어진 나무로 집을 짓고, 주어진 물 위에 둥둥 떠다니며 살아갑니다. 동물의 삶에 자연의 변화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의도에 따라 자연을 바꿉니다. 때로는 자연을 파괴하기도 하며, 착취합니다. 그래서 지구온난화라는 문제도 일어나겠지요.
프로이트의 발견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근원적 성충동을 통해 자연을 다른 색으로 색칠합니다. 인간은 리비도라는 성적 에너지를 통해 자연을 새로운 것으로 바꿔버립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문명입니다.
인간의 성충동은 또한 커뮤니케이션 행위이기도 합니다. 흔히 예술가들은 자신의 성충동을 승화시켜 작품에 담아내지요. 예술가들은 그런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합니다. 작품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은밀한 고유성을 작품에 담아냅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의 소통에 탁월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성충동은 예술의 행위처럼 문화코드로 실천되고, 문명은 성충동의 에너지를 자신의 발전동력으로 삼습니다. 문명은 발전을 위하여 성충동의 에너지를 “아름다움”으로 재구성합니다. 반대로 인간은 충동의 에너지를 아름다움의 에너지로 발산하여 자기의 주체성(고유성)을 드러냅니다.
그것의 신화적 상징이 사티로스입니다. 그는 자기의 성충동을 거리낌없이 발산하지요. 그러한 충동 그 자체, 신화 속의 리비도 그 자체를 말함으로써 라깡은 성충동이 문명의 근본적 동력임을 말합니다.
따라서 그것hessecabeau = escabeau라는 동음이의어는. “승화”와 연결됩니다.
escabeau는 라캉이 프로이트의 승화개념을 재발명한 것으로, “조그마한 사다리”를 뜻합니다. 연단이나 무대에서 발언자를 주목시키기위해 세우는 조그마한 사다리를 뜻합니다. 이 에스까보가 바로 예술작품입니다.
충동이 예술작품으로 드러나 표현됨으로써, 주체는 세상에 자신의 고유성, 본 모습을 드러내지요.
만약에 이러한 예술작품이 없다면, hihanappat qui soit ding! d’nom dhom = il n'y en a pas qui soit ding ! de nom d'homme(그것이 없다면, 인간의 이름에 진동이라는 것도 없다)이 됩니다. 에스까보라는 것, 예술작품의 창조적 행위가 없다면, 인간의 이름이라는 것이 진동하는 일도 없게 될 것입니다. 오직 이름을 남기고 자기를 명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작품을 창조하는 길이지요. 자기의 길을 스스로 창조해내는 예술작품으로서의 삶, 그것이야말로 자기의 이름을 높일 수 있는(에스까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지요.
따라서 인간들은 경쟁하지요. 자기의 이름을 남기는 인정투쟁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것이 문명의 본모습입니다. 이는 헤겔이 말한 바 있지만, 라깡은 헤겔의 인정투쟁의 밑바닥으로 나아갑니다. 고유한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열망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리의 성충동입니다. 그리하여
Mouiller, 오가사와라 신야는 이것을 젖어라(성적 흥분으로서)라는 초자아의 절대적 명령이라고 주해를 달았습니다. 초자아는 프로이트가 사용한 독일어로 위버-이히Über-Ich입니다. 즉 이히(나)를 넘어선(위버) 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나를 감시하는 나를 갖고 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무단횡단을 하면, 내 안의 초자아가 나를 비난합니다. '사회적 규범을 어기다니, 그러고도 니가 제대로 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어?' 이렇게 내면화된 사회적 규범, 그것이 바로 초자아인 것이지요. 초자아는 내면에서 나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검열합니다.
그런데 라깡은 초자아의 절대적 명령이 “즐겨라!”, 즉 “향락하라!”라고 말합니다. 초자아는 우리를 비판하고 검열하면서도 동시에 우리에게 사회가 원하는 방식으로 즐기라고 명령합니다. 즐기라는 절대적 명령에는 이런 뜻이 숨어있지요. 초자아가 즐기라고 하는 것 외에는 즐기지 말지어다. 중세 시대의 교회에서는 정상위 체위 말고 다른 체위를 금지했었지요. 이게 바로 초자아의 명령입니다. 초자아는 우리에게 즐기는 방식까지 강요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문명의 명령, 문명의 문법을 무시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법이 없이는 인간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가 문명인인 한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에스까보, 우리의 승화, 우리의 존재 그 자체를 세상에 드러내보이려면, 우리는 초자아의 명령을 수행하면서도 우리의 특이성을 드러내야만 합니다. 그래서 라깡은 상징계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상징계에 안착하면서도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삶, 라깡이 말했던 것은 상징계의 구멍을 통해 은폐되어있던 실재와 직면하는 것이지요. 그래야만 우리 존재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으니까요.
두 번째 문단은 그러한 문명 속의 승화를 말합니다. 그런데 조이스는 정신분석의 도움 없이도 이러한 방식 그 이상으로 나아갔지요. 라깡은 조이스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승화에 대해 요약하고, 밑작업을 했던 것입니다. 라깡의 난해하면서도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수사학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