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가 고도로 발전함에 따라 인간이 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이제 진부합니다. 사회가 발전하면 그 속의 구성원인 인간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회와 인간은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이다"
사회가 변하면 인간도 변한다라는 명제는 그 기원이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소급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인간을 “폴리스적 동물”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동물”, “사회적 동물”과 같이 전해진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당대의 폴리스는 행정단위를 가리키기도 하며, 정치단위, 커뮤니티 단위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오늘날은 아파트 단지에 “커뮤니티 센터”와 같이 주민들이 모이는 장소가 존재하는데요. 고대 그리스에서 주민들이 모이는 장소가 “폴리스”였고, 그 중심에 “아고라”, 광장이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광장에서 정치적, 사회적 문제거리가 토론되고, 최종결정되었습니다. 이처럼 인간들이 공통의 목적을 이루는 행위를 하는 장소가 “폴리스”였습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도는 인간이 폴리스, 즉 사회를 떠나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에 가깝습니다.
근대혁명이 일어난 이후 사회학의 삼대장(뒤르켐, 베버, 마르크스)으로 인해 “사회”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고대인과 근대인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변화에 주목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바로 “자본주의”의 발전입니다. 자본주의는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체제”입니다. 경제학이 한정된 재화를 어떻게 잘 분배할 것이냐에 관련된 학문이라면, 자본주의의 핵심 테마는 “이윤추구”입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합리성”의 개념이 “이익”과 연결되었습니다.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합리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자본주의 이전에는 이익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좋은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플라톤의 국가 1권을 참조하면 좋을 것입니다.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를 “강자의 이익”이라고 규정합니다.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계속 그러한 주장에 반론을 거듭합니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반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의란 실제로 “강자의 이익”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위와 현실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당위란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현실이란 “사실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팩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반면에 철학은 가치와 당위를 추구하는 학문입니다. 물론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마이클 샌델과 같은 현대철학자들이 사회과학에서 핵심 개념을 빌려다가 설명하는 이유도 현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철학이 추구하는 것은 어쨌든 가치이며 당위입니다. 사회철학이라면 마땅히 사회가 나아가야 할 “이념”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정치철학이라면 마땅히 정치가 지향해야 할 “이념”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지금 사회가 이렇게 난세로 가고 있는 이유는 “이념” 즉 가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가 나아가야 할 마땅한 가치에 대한 논의가 없기 때문에 세상이 혼란해진 것입니다.
미국의 1달러
그렇다면 가치란 무엇일까요? 현대사회에서 핵심 가치란 무엇입니까?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핵심가치란 당연히 이익입니다. 바로 “돈”이 그 자체로 가치가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혁명의 핵심은 물건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산물, 심지어 인간까지 “돈”으로 규정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인간을 돈으로 계산해서 가치평가를 하기 때문에 매우 편하고 직접적으로 와닿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혁명의 핵심입니다.
흔히 프로스포츠 선수들을 평가할 때 몸값이 100억짜리 가치를 가진 선수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이것이 인간을 “돈”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실제 인간이 얼마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그 사람의 역사(스포츠 선수라면 경기기록)를 토대로 미래에 어느 정도의 돈을 창출할지 예측하고 그에 맞추어 돈으로 평가하는 겁니다. 자본주의가 잘 진행되면 오로지 실력에 따라 돈이 주어지는 것이니 매우 이상적인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의 이념은 중세까지 적용되었던 더러운 “혈통주의”를 깨부수고 이제 실력으로만 평가받고 싶다는 부르주아의 욕망이 개입한 결과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서 자본주의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실력주의 평가라는 장점에 맹공을 퍼부은 사람이 마르크스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잘 공부하고 그에 비판을 가합니다. 자본가들은 이미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회사를 보유하고 있는 금수저이겠지요. 금수저는 이미 자본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초토대가 닦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통해서 돈을 법니다. 100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잃어도 좋다는 식으로 비트코인과 같은 곳에 1억을 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상승장에서 거액의 돈을 벌 수 있습니다. 반면에 100만원 밖에 없는 사람은 기껏해야 만원이나 십만원을 넣고 얻을 수 있는 돈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필연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심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시작이었던 바스티유 감옥 습격
여기서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근대혁명이란 본래 귀족들의 혈통주의를 깨부수려고 나왔습니다. 부르주아는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귀족은 대부분 지금말로 “금수저”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부르주아 입장에서는 실력도 없는 귀족이 자신들보다 “혈통”이 좋다는 것 하나로 우쭐대는 것이 보기 싫었을 겁니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 세력을 규합하여 “혁명”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것이 프랑스 대혁명의 개요입니다.
그런데 부르주아는 권력을 잡자마자 무산계급을 배신합니다.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를 보세요. 있는 자들이 자식들에게 세습하는 것을 보면 과거의 귀족과 달라진 것이 없지 않습니까? 이처럼 근대혁명의 결과가 현대에 와서는 똑같이 귀족사회로 변모한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은 더 복잡해졌습니다. 돈으로 사람을 규정하는 시대가 되다보니, 돈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실력을 키우기에도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절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듯 합니다. 사람에게는 돈을 떠나서 “명예욕”이라는 것도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명예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영웅 아킬레우스는 명예를 달라고 호소합니다. 아킬레우스는 사실 작품 초반에는 찌질하고 철이 없는 양아치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양아치가 인간의 한계와 명예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진짜 영웅으로 변해가는 것이 일리아스의 줄거리입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교과서였던 일리아스는 전쟁통이라는 극한의 배경을 다루면서도 “명예”라는 고귀한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진정한 영웅이라면 부와 권세뿐 아니라 “명예”까지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명예”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돈으로 명예까지 사려는 사람들도 존재하긴 합니다만, 그들은 예외로 두어야 할 것입니다. 명예는 “고귀함”이라는 덕목과 연결되어 있고, 이 덕목은 더 나아가 “위험 앞에서의 자기확신”과 연결됩니다. 이 정의는 하비 맨스필드로부터 빌려온 것입니다.
“위험 앞에서의 자기확신”은 thymos 튀모스(용기, 기개)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맹함이기도 합니다. 소방관들은 죽음의 위험 앞에서도 생명을 구하는 일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현장에 진입합니다. 사람들을 불타는 현장에서 대피시키고, 자신은 불꽃이 타오르는 현장에 진입합니다. 이것이 용기이며, 자기확신이고 더 나아가 튀모스인 것입니다. 이것이 명예를 지키는 삶의 대표적 예시입니다.
이처럼 명예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부여되는 최고의 덕목입니다. 이러한 것이 사라지게 되면 사회가 어떻게 될까요? 내부에서부터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사회를 세우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황에서 한국사회를 새로 만든다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가 심어놓은 행정체제를 그대로 가져다 씁니다. 처음부터 다시 구성하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그 지겨운 작업을 하느니 일제의 잔재를 그대로 쓰는 것이 낫겠다 싶었던 것이지요. 이런 행위 자체가 이익을 추구하고 명예를 저버린 결과이기도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한국사회는 다시 시작한 그 시점에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고 명예를 버렸습니다. 그것이 어떠한 파급효과를 불러왔는지는 길게 설명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명예가 사라진 시대. 이익추구만이 진리가 되어버린 시대에서 현대인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철학과 출신입니다. 철학과 출신은 모두 공감할 겁니다. 그 돈 못버는 학과에 왜 갔냐고 신기한 눈빛으로 보는 주변사람들이 많습니다. 실제로 철학과 출신이라고 하면, 뭘 배우냐? 뭔가 문제있는거 아니냐같은 질문을 많이 받기도 합니다. 철학과 출신은 이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리고 철학과 출신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 중에 하나가 “사주 볼 줄 아냐?”고 물어보는 질문입니다.
앙투안 드니 쇼데 - 에로스 / 네이버지식백과
철학을 가장 간단히 이야기하면 가치를 추구하는 학문입니다. 저는 철학과에서 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했습니다. 플라톤 철학을 지혜에 대한 에로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즉 철학이란 지혜에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인간은 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지혜를 갈구합니다. 나에게 없는 것에 대한 갈구, 나에게 없는 것인 전능한 지혜에 대한 사랑이 바로 철학하는 태도입니다. 끊임없이 모르는 것에 대해 갈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철학함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순수하지 않습니다. 철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도 잠시 몸을 담았습니다만, 취업현장에서 철학과 출신이 대접받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이처럼 현대사회, 더 나아가 한국사회에서 가치를 공부하는 문학, 역사, 철학과 출신은 더욱더 무시 받는 형국입니다.
제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철학과 출신이 무시받고 있으니까 좀 잘 봐주세요와 같은 뜻에서가 아닙니다. 적어도 가치를 공부하는 학문들이 숨 쉴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은 있어야하기 때문에 이런 글을 쓰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문학, 역사, 철학이 사라지면 사회 자체도 무너집니다. 어떤 사회든지 가치를 다루는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사라져버리면 그 사회는 최악의 사회가 되어버립니다. 사회가 나아가야 할 가치에 대해 공부하고 이야기하는 최소한의 장소라도 사라져버리면 난세가 도래합니다. 어쩌면 지금 이미 난세가 된 듯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이미 “즐길거리”가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즐길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에 가치를 고민할 틈이 없습니다. 그리고 가치에 대한 고민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회환경의 영향도 존재합니다. 생각해보면, 힘들고 고된 하루 일을 마치고와서 가치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즐길거리, 오락에 매진하는 것이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있어서 즐길거리만큼 좋은 것은 없으니까요.
사실 공부하는 것이 스트레스가 되어버린 우리사회에서 가치에 대한 고민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수학능력시험이 퍼즐맞추기와 같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적어도 이 공간만큼은 이익추구에 대해서 잠시 잊어버리고 조금만이라도 “가치”에 대해서 고민해보자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의 가치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이익"만이 아니라 "가치"의 공간임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명예”라는 가치에 대해서 다같이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해서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이 조금이라도 달라진다면 그 이상의 바랄 것은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