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부터 “먹방”이 대세입니다. 많은 대중매체에서 먹방에 관련된 컨텐츠들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먹방 드라마인 “고독한 미식가”의 배우인 마츠시게 유타카는 아저씨 혼자서 밥 먹는 드라마가 설마 인기 있을리 없지, 하는 심정으로 드라마를 찍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먹방은 그냥 밥 먹는 방송입니다. 인터넷 방송을 시작으로 TV까지 대부분의 예능을 “먹방”이 점령했습니다. 어째서 먹방이 인기있는 것일까요?
곰곰이 살펴보면 먹방은 단순히 많이 먹기만 해서는 뜨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먹으면서 동시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또한 먹는 것 그 자체를 진심을 다해 즐기고 있다는 태도가 드러나야만 성공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먹방을 하는 주체와 먹방을 보는 주체 두 측면을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먹방을 보는 사람들은 단순히 혼자 쓸쓸히 밥을 먹기 싫어서 먹방을 보는 것일까요? 아니면 대리만족을 위해서 그저 먹방을 시청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먹방을 시청함으로써 공허함을 채우고 있는 것일까요? 사실 이러한 분석은 일견 맞는 측면도 있습니다.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수의 40%에 육박하고 있다는 보도처럼 혼자서 밥을 먹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은 대부분 힘겨운 하루를 마치고 혼자서 저녁을 먹을 때 먹방을 보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저도 먹방을 보면서 밥을 먹은 적이 많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쓸쓸하기 때문에 그런 점도 있긴 합니다만 사실 재미있는 예능을 보면서 밥을 먹으면 즐거운 식사가 되겠다 싶어서 먹방을 보며 밥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먹방을 보는 사람들은 먹방을 하고 있는 주체가 철저히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즐거움을 공유하고 싶어서 먹방을 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인 자크 라캉은 욕망이란 “타인의 욕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새로나온 스마트폰이 사고 싶다는 욕망은 온전히 나로부터 비롯된 욕망이 아닙니다. 주위사람들이, 혹은 인터넷에 올라온 글에서 ‘이번에 나온 스마트폰 짱이네요.’ ‘이번 스마트폰을 사고나니 너무 편하고 생활도 윤택해진 느낌이 듭니다.’와 같은 리뷰를 보고 구매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남으로부터 욕망의 내용이 전달되고, 그 욕망이 전이되어 나의 욕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욕망이란 사회분위기에 따라 조성됩니다. 입소문과 비슷한 것이기도 하지요. 그 제품 좋다더라와 같은 입소문을 타면 순식간에 상품이 매진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따라서 매스컴이 욕망을 부추기는 장치라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먹방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먹방의 핵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맛있게 먹는 것입니다. 자기 앞에 놓인 음식을 여유있게, 진심을 다해 즐기는 사람만이 먹방의 고수입니다. 이 분들의 방송을 보면 음식을 즐기고 사랑하고 있다는 태도가 느껴집니다. 따라서 먹방을 보는 사람들은 즐기고 있지 못한 자신이 동경하는 즐기고 있는 주체를 바라보면서 그 욕망의 전이를 원하기 때문에 먹방을 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라캉의 응시이론을 통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자크 라캉, 세미나11, 새물결 참조)
나는 사물을 보고 아 키보드다, 컴퓨터다, 책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먼저 주체에게는 “봄Seeing”이라는 과정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라캉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응시Watch”가 먼저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가 응시하냐면, 바로 대상, 타자들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사물이 나를 응시한다고? 거기에는 눈이 없는데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지? 일단 라캉이 정신분석가이고, 그의 이론은 정신분석의 임상과정에서 성립한 것임을 전제로 해야합니다. 라캉의 응시이론은 주체가 환상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라캉이론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본래 모습이 “공백”이고 무無라는 것이 기본 전제입니다. 그런데 공백을 마주하며 살아갈 수 없으니 인간은 가상의 스크린을 만들어서 그걸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보는 것seeing이 먼저가 아니라 대상이 나를 응시하는 것watch이 존재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요? 우리를 바라보는 타자, 즉 그건 대타자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 먼저라는 뜻입니다. 대타자란 사회적 시선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끊임없이 감시하는 윤리 혹은 도덕적인 명령들입니다. 따라서 대타자는 필연적으로 언어체계, 사회적 관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고 열심히 즐기며 살라고 이야기합니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즐기면서 살아야지, 혹은 돈벌어서 뭐하냐 놀아야지와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이런 말들은 전부 타자의 이야기들이죠. 즉 대타자는 즐기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고도화는 어쩌면 즐겨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적용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여기에는 내가 즐기고 싶은 것,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입니다.
라캉이 말하고 싶은 점도 이것입니다. 원래 세상은 공백인데, 언어체계를 통해서 대타자가 나오고 그러한 대타자의 명령이 나를 응시하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 응시, 명령을 통해서 즐겨라!하는 언어체계가 나에게 전달되고, 즐기고 싶다는 욕망의 생성으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그 욕망이란 나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욕망, 대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에 항상 욕망은 타인의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환상 또한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즐기는 주체를 바라보며 즐기고 있다. 그러므로 나 또한 즐기는 주체가 된다. 먹방하는 주체는 진정으로 즐기고 있다는 환상을 전달하고, 먹방을 바라보는 주체는 방송을 보면서 즐기는 것. 하지만 방송이라는 스크린 자체가 일종의 환상일 수 있겠지요. 이러한 환상의 생성과정 자체가 먹방의 성공요인입니다. 더 나아가면 즐겨라!라는 대타자의 명령으로부터 비롯된 즐겨야만 한다는 강박관념, 욕망의 형성이 최초원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즐길거리는 넘쳐나지만 무엇을 즐겨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꼭 즐기면서 살아야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즐거움과 가치는 별개의 개념입니다. 우리시대의 즐거움이 쾌락과 연결되어 있다면, 가치는 쾌락보다 상위의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은 너무 과도하게 즐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즐겨도 괜찮습니다. 남이 한다고해서 꼭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요.
아마 한국사회는 사회에서 강요된 것을 해나가면 먹고 사는 시스템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이들이 다 하는데 내가 안하면 무언가 뒤처지는 것 같다는 기분 때문에 금새 유행이 되어버리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자기가 원하는 것을 고민할 이유도, 필요도 사라져버린 것이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공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자신이 즐길 수 있는 것, 온전한 나만의 욕망을 찾아내야만 공허를 해소할 수 있습니다. 라캉 정신분석의 핵심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밖에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의 목표는 자기의 고유한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주체적인 삶을 창조하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