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증상
그랬다.
엣지러너는 때로는 어설픈 데이비드의 작전이나 황당하기도 한 루시의 무모함이나 그도 아니면 어이없는 메인의 고집이나 폭력적인 아버지라고도 볼 수 있는 아담 스매셔의 형상이나 그런 것들로 구성되있지만.
마지막에 연인들은 엇갈리지만, 이상하게도 죽은 자가 구원을 받고 살아남은 자는 비탄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그런 비극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정신분석의 경험은 비극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모든 인간의 삶이 어떻게 보면 다 비극이다. 그래서 아주 다른 분야 학자의 말이지만, 종의 기원을 쓴 다윈의 말처럼 거기에는 “장엄함이 깃들어있다.”
우리의 삶은, 영원히 찾아낼 수 없는 상실의 연속이다. 최초의 충동은 억압되었다. 그도 아니면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언어를 통해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 상실의 파편들을 공백이라 명명하고 더듬으면서, 영원히 그 흔적을 쫓으며 살아간다.
이건 흡사 루시의 모습과도 같다. 아무리 네트워크를 떠돌아도 데이비드의 흔적만을 찾을 수 있을 뿐, 데이비드 그 자체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데이비드는 사라져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더 절망적으로 갈구하게 된다.
사라져버린 것을 갈구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미 플라톤은 향연에서 희극작가의 입을 빌어 말한 바 있다. 연인은 원래 하나였지만, 오만했기 때문에 신이 둘로 갈라놓았고, 그로 인해 영원히 반쪽을 찾아 헤맨다. 그게 바로 에로스, 사랑이다.
이처럼 희극과 비극은 공존하고 있으며, 비극적 차원을 인정했을 때, 우리 삶이 충동을 영원히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을 때, 희극은 시작된다. 기쁜 소식은 아마 거기서부터 들려올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힘들여서 살 필요가 없다. 아무리 악을 쓰고 이를 꽉 깨물며 살아봤자 억압된 것은 언젠가 다시 도래한다. 그렇게 도래하는 것들을 반가운 존재라고 생각하며 환영하도록 하자. 그게 걸리적거리고 귀찮고 나를 아프게 할지라도, 그건 아주 반가운 존재이다.
아마 마지막에 루시가 희미한 미소를 띨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루시에게 데이비드는 증상이다. 너무나도 아프고 나를 건드리고 흔들고 꼬집고 깨물고 짜증나게 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나의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화의 제목이, 나의 달, 나의 사랑인 것이다.
coda를 먼저 올립니다. 엣지러너에 대한 분석은 계속 이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