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을 떠돌다 사이버펑크 : 엣지러너의 감독 이마이시 히로유키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얼핏 본지라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는 “남녀의 엇갈림”에 대해 다루고 싶었다고 말했다. 남녀의 엇갈림. 그게 작품의 주제라면, 여기서 생각나는 그림이 하나 있다.
르네 마그리트, 연인들
연인들은 두건을 쓴 채 키스하고 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인 라캉을 따라서 베일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미술사에서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알려져있다. 라캉도 젊었을 적 초현실주의자 모임에 참석하곤 했다. 초현실주의는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그들은 프로이트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고, 현실을 뛰어넘는 무언가에 대해서 표현하려고 했다. 현실을 뛰어넘어 진짜로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무언가를 그려내려고 했다. 그 무언가는 바로 충동의 세계이다.
남녀는 엇갈릴 수밖에 없다. 라캉의 말에 따르면 “성관계는 없다.” 남자가 여자에게 바라는 것, 혹은 여자가 남자에게 바라는 것은 서로 다르다. 성관계와 같은 안정적인 질서는 없기 때문에,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이 가능하단 말인가?
사이버펑크 : 엣지러너에서도 데이비드와 루시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최초의 만남은 루시의 도둑질로부터 시작됐다. 루시는 아라사카 학교 아이디를 가지고 있는 데이비드를 부유층이라고 “오해”하고, 그의 두뇌칩을 훔친다. 그러나 산데비스탄 사용자인 데이비드는 그런 루시의 팔을 낚아챈다. 이게 첫만남이다. 여기서 둘은 도둑질하는 사람과 도둑질당하는 사람으로 만났다.
루시는 데이비드를 부유층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그의 칩을 훔친 것. 데이비드가 퇴학당했는데다가,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루시는 산데비스탄 사용자인 그에게 도둑질 동업을 제의한다. 여기서 데이비드는 같이 도둑질하는 사람으로 바뀐다. 모종의 모험에 같이 가담하게 된 것이다. 오해로부터 시작된 관계에서 동업자가 되는 관계까지. 여기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Sustain/Decay인데, 이는 직역하면, 살게되다/퇴락하다이다.
살아가려면 퇴락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데이비드의 현재 처지, 엄마는 사고로 죽었고, 학교에서 쫓겨났으며, 집세도 내지 못하는 상태, 여기서 더욱더 퇴락해야 살아갈 수 있음을 암시하는 노래선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데이비드는 루시의 도둑질에 참여하고, 이는 “사이버펑크”가 되는 길로 이어진다. 그런데 라캉의 정신분석으로 해석해보면, 퇴락하는 것 즉 몰락은 상징계(사회적질서)로부터 떨어져나와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떨어져나옴, 퇴락, 몰락은 동시에 가장 윤리적인 행위가 된다. “나”를 알게 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위반이 반사회적 행위를 권장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회적 질서가 규정해놓은 정해진 욕망과 정해진 삶의 행로에서 벗어나 진짜로 네가 하고 싶은 것이 뭔지를 질문해보라는 뜻이다. 이것은 삶에 있어서 진짜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잠깐이라도 사회적 질서 속에서 떨어져나옴이 필요하다. 사회적 질서는 우리에게 몇 살에는 무엇을 해야 한다, 언제 결혼하냐, 언제 취업하냐, 언제 집사냐 등등... 무수히 많은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사회적 질서가 원하는 바대로 살아가면, 그것도 묘한 쾌감이 있다. 사회가 원하는 바를 충족해놓으면 안도감이 든다. 그런데 동시에 허망함이 몰려온다. 그 허망함은 무엇때문일까? 진짜로 내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짜로 내가 원했던 것은... 이러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 일단 사회적 질서로부터 떨어져나옴이 시작된 것이다.
데이비드는 방황했다. 모든 상징적 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시를 만나고 무언가를 시작한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 묘하게도 루시가 데이비드에게 자꾸 뭔가를 주려고 한다. 엄마의 자켓을 함부로 뺏어서 거기에 Edge Runner라는 글자를 새기려고 한다던가, 자기의 소망을 알려주지 않나, 그도 아니면 이러한 질문도 던진다. “왜 너는 남의 꿈을 위해서 살아?” 뭔가를 주려고 한다는 것.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이 자꾸 뭔가를 주는 것. 그래서 남을 흔들어놓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루시는 자꾸 데이비드에게 뭔가를 주려고 한다.
데이비드는 남의 꿈, 엄마의 꿈을 위해 살았었다. 본인이 아라사카 학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데이비드에게 루시는 흥미를 보인 것이다. 그래서 루시는 자기의 꿈을 보여준다. “달”에 가고 싶다는 꿈이다. 이 세계는 지옥과 같기 때문에, 달이라는 이상향에 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둘은 작중 세계관의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기계, BD를 통해 달에서 웃고 떠들며 놀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은 이 모든 사건이 루시의 속임수였다는 것이다. 실은 데이비드가 장착한 산데비스탄의 원래 주인은 루시가 소속된 사이버펑크 용병단 대장인 메인의 것이었다. 그래서 메인의 지시로 데이비드를 속이고 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데이비드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어서 계약이 틀어진 것이며, 산데비스탄 능력을 통해 용병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어필하여 그들의 일원이 됨으로써 “사이버펑크”가 된다. 루시가 새겨준 기표, 엣지러너의 다른 말인 사이버펑크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서부터 데이비드의 욕망은 다시 시작된다. 이번에도 역시 남의 꿈, 루시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사이버펑크가 된 것이다.
그리고 둘은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고 키스를 하게 된다. 데이비드는 같이 갔던 달이 좋았다고 이야기한다. 루시 또한 달에 가고 싶다는 소망은 거짓말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때 데이비드는 루시에게 너를 반드시 달에 데려가준다고 약속한다. 반면에 루시는 데이비드에게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이런 엇갈림으로부터 사랑의 행위가 시작된 것이다.
인간이 최초의 쾌락, 만족을 느끼는 것은 엄마와의 관계에서다. 엄마와 아이는 한 몸이었다. 하나였다. 그런데 출산의 과정을 거쳐 둘로 분리된다. 아이는 엄마가 “나”였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요구한다. 그래서 엄마에게 충동을 느낀다. 이걸 섹스, 즉 남녀의 성적결합으로 생각하지 말고, 강력한 합일의 충동으로 느껴야한다. 원래 내것이었던 것이므로 무엇보다도 더 갈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명의 언어는 엄마를 금지한다. 엄마는 내것이었지만, 반드시 떨어져나가야만 한다. 근친상간의 금지와 억압은 모든 문화권에서 보편적인 것이다. 그래야만 문명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와 떨어진 아기는 그래도 엄마에게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엄마는 아기에게 배변활동을 시키고, 배부르게 젖을 먹여주고, 따스한 눈길로 바라봐주고, 다정한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준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엄마와 아기는 서로가 서로에게 만족을 느낀다. 그 관계로부터 항문충동, 구강충동, 시관(응시)충동, 호원(목소리)충동이 나온다.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엄마라는 전체성이 떨어져나가고, 아기는 어른이 되어서 4개의 부분충동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것은 살아가면서 계속 재현된다. 사랑하는 대상의 목소리나 시선, 혹은 그건 권위자의 목소리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의 삶에 섹슈얼리티가 없다면, 그 삶은 유지될 수가 없다는 것이 프로이트의 발견이었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발견한 성충동은 단순히 섹스 이야기가 아니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문제로부터 억압된 충동이 인생을 살면서 튀어나와 반복된다는 것. 이것을 발견했다는 점에 프로이트의 업적이 있다. 그리고 이걸 언어학적인 개념을 가져와 발명한 사람이 라캉이다.
그런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부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목소리나 시선이나 혹은 몸이나 그도 아니면 그 사람의 재력이라든지. 이처럼 모든 사랑은 부분충동이다. 사실 그걸 넘어서 남자가 여자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바라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는 것, 즉 잡으려해도 잡을 수 없는 최초의 만족을 주었던 엄마인 큰사물이다. 그것은 억압된 것이기 때문에 상징계에서는 결여나 빈 틈, 공백으로 드러난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사실 엄마이자 큰사물이자 공백이다. 그래서 절대로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운동이다. 따라서 라캉은 세미나1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불가해하게도
내가 사랑하는 것은 네 안에 있는
너 이상의 것 – 대상a – 이기 때문에,
나는 너를 잘라낸다.
데이비드는 루시에게 달에 데려가준다고 이야기했다.
반면에 루시는 데이비드에게 네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루시는 이에 강박적으로 “아라사카”의 속임수로부터 데이비드를 지키기위해 아라사카 요원들을 살해하고 다닌다. 하지만 그것때문에 덜미를 잡혀 아라사카에게 붙잡히고 만다. 결국 데이비드는 루시를 구하기위해 팔다리를 잘라내고 정신을 좀먹는 대형 크롬인 “사이버 스켈레톤”을 이식하게 된다. 그리고 사이버사이코가 된다.
이 사이버사이코 상태로부터 잠시 이성을 되찾게 해주는 것도 루시의 키스다. 루시가 계속 데이비드의 정신줄을 붙잡아주는 이유가 뭐냐면, 아무 댓가없이 기표를 선물해주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진정작용이 있다. 데이비드의 망가진 삶에 자꾸 뭔가를 주기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해준다.
데이비드는 루시를 안고 아라사카 타워에서 추락한다. 이 추락, 퇴락을 통해 데이비드는 자기 자신을 찾았다. 데이비드는 루시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던 나는 네가 꿈을 이뤘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사이버 스켈레톤의 힘으로 살아남은 데이비드와 루시는 최후의 전투를 거치게 된다. 그리고 최후의 전투를 거쳐 데이비드는 죽고 루시는 살아남는다.
데이비드의 꿈은 “루시가 살아남아 달에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루시의 꿈은 “데이비드가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둘의 소망은 엇갈렸다. 그래서 모두가 행복하지 않은 결말을 맺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데이비드의 죽음 이후, 루시는 달에 간다. 세상을 잃은 표정을 하고 달에 간다. 그건 사실 루시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달에 가는데, 자기 꿈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데이비드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한 것이다.
엣지러너가 대단한 작품인 이유는 여기에 덤으로 무언가 붙는다는 것에 있다. 데이비드가 죽자, 루시는 공허에 빠진다. 1화의 데이비드처럼. 루시는 네트워크의 세계를 떠돌며 데이비드의 흔적을 찾아다닌다. 그러나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하자 절규한다. 그러다 “달”을 본다.
그 달은 둘을 이어주었던 매개체이자, 공동의 표상이다. 동시에 데이비드가 소망했던 루시의 욕망이기도 했다. 이에 달로 떠난 루시는 I really want to stay at your house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데이비드의 유령을 본다. 여기서 데이비드의 유령이 지속되었다면, 루시는 정신병자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삶을 살아내기위한 과정이기도 하다. 데이비드의 유령이 사라지며, 루시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눈을 감고 햇살을 맞이한다. 환영이 현실로 전환되면서 루시는 your house를 의식으로 받아들인다. 데이비드는 마지막까지 유령의 모습으로, 실재의 출현을 통해 루시의 삶을 지탱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루시는 어찌저찌 그게 지옥이라 하더라도 현실을 살아낼 수 있게 되었다. 데이비드는 죽어서 루시의 행위로 인해 모든 소망을 이루었고, 소망을 다 이루고 만족한 주체는 루시를 통해 각인되어 삶을 살아가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 작품을 대단히 윤리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하며, 보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게끔 한다는 점에서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