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yce le Symptôme 증상 조이스
오늘은 첫 시간이니만큼 한 단어, 아니 제목만을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10여년 정도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며 철학공부를 해서 느낀 점은, 독해는 꼼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라깡은 철학자도 아니고, 문학자도 아니며, 인문학자도 아니며, 정신분석가입니다만, 어쨌든 저의 스타일대로 독해는 철학과에서 강독하듯이 해보려고 합니다. 이게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한 번 해보겠습니다. 제 욕망이 강력하다면 불과 몇 개월만에 끝날 수도 있겠지요.
더불어 라깡읽기는 저의 증상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고통스럽지만 매우 즐겁습니다.
Symptôme, 증상의 번역어를 무엇으로 해야 할 것인지가 시작부터 걸립니다. 그대로 증상으로 번역해도 되지만, 제임스 조이스를 지칭한 것이므로, 이는 분명 생톰sinthome을 뜻할 것입니다. 생톰은 후기 라깡의 주요 개념입니다. 라깡은 인간의 심적구조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 - 사실 이것도 정확한 번역은 아니며, 일본인들의 번역을 가져온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은 상상적인 것, 상징적인 것, 실재réel라고 번역해야 맞습니다만, 학계에서 이미 통용되고 있으니 그대로 따릅니다. 오가사와라 신야의 번역을 그대로 따라, 상상의 자리, 상징의 자리, 실재의 자리로 번역하는 것도 고려해보았지만, 그렇게되면 너무 길어져서 기존에 통용되던 것을 그대로 따릅니다. - 라고 말한 바 있지요.
상상계는 자아를 가리킵니다. 라깡의 유명한 거울단계론이 있습니다. 아기는 처음에 손과 발과 엉덩이를 자기 것으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엄마의 젖가슴을 빨면서, 그게 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유기, 젖을 떼는 시기가 되면 아이는 대단히 힘들어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것을 뺏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엄마의 젖가슴을 상실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이 모성적 젖가슴에 집중하여 임상실천을 발전시킨 사람이 정신분석의 또 다른 스승인 멜라니 클라인입니다. 클라인에 대해서는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파편화되었던 신체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때가 오니, 그것이 거울을 바라보면서입니다. 거울을 바라본 아기는 처음에 저게 나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엄마나 아빠가 “저게 너란다!”라고 호명, 명명을 해주지요. 그리고 아기는 “저게 나구나!”라는 인식을 통해 통합된 신체이미지, “나”의 이미지를 획득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미지를 통해 획득된 “나”가 바로 상상계의 자아입니다.
그런데 거울이미지는 온전한 나라고 볼 수 없지요. 그건 어딘가 이상합니다. 그건 상상된 결과물이기 때문이지요. 자기의 아름다움에 심취하여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사랑에 빠졌던 나르키소스의 신화처럼, 자아이미지가 극한에 이르면 그것은 나르시시즘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병적인 자기애에 대해서 알고 계시나요. 그 상황까지 가면 모든 것을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해석하게 되지요. 범죄를 저지르고도, 차라리 죽어없어지는 것이 좋을 자를 처벌한 것인데 뭐가 문제지? 라는 식으로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렇게 나르시시즘이 극한에 이르면, 파괴충동으로 이어집니다. 자아이미지가 강해지면, 전능하다는 환상에 빠지고, 전능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을 맘대로 집어삼키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아주 강렬한 충동, 파괴충동이 일어나게 되지요. 그렇다면 파국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그 파국을 막기 위해서 아버지는 명령합니다. “나대지마라!”라고 말이지요. 정신분석학에서 아버지는 정지시킵니다. 과도하게 행동하는 아이를 정지시키고, 과도하게 충동적인 아이를 멈추고, 과도하게 사랑하려고 하는 아이를 엄마로부터 떼어놓습니다. 여기서 출현합니다. 아버지의 법이.
라깡은 아버지의 법이라는 말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을까요? 아버지들이 아이를 저지함으로써, 아버지의 이름은 하나의 은유가 됩니다. 무엇의 은유냐면, 법의 은유가 되지요. 모든 인간이 마땅히 지키고 따라야하는 규범으로서의 법. 그것의 은유가 아버지가 됩니다. 따라서 아버지는 암묵적으로 하나의 조건을 겁니다.
‘엄마를 포기해라, 엄마를 포기하고 아버지와 같이 법을 따른다면, 너도 멋진 소년/소녀가 되어서 멋진 파트너를 얻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아이는 거세됩니다. 실제로 성기가 잘리는 것이 아닙니다. 라깡파에서 거세는 상징적인 것입니다. 거세란 아주 소중한 것을 빼앗기는 또 다른 상실을 말합니다. 우리는 엄마를 뺏겼다고 이해하는데요. 정신분석 교과서에서 대부분 그렇게 서술하고 있지요. 그런데 여기서 엄마 또한 실제 엄마가 아니라 상징적인 엄마입니다. 일단 쉽게 이해해봅시다. 아기는 여기서 사랑의 대상을 빼앗긴 겁니다.
사람은 살면서 아버지와 같은 존재들을 만나며 살아가지요. 인간은 한번 배운 것을 써먹으려고 해서, 아버지로부터 배웠던 암묵적 약속, 즉 아버지와 같이 법을 따라라, 즉 사회의 고정관념을 수용해라, 너의 욕망을 포기하고 사회의 고정관념을 따라라를 충실히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은 문명의 전략이기도 합니다. 라깡이 어디선가 문명이란 것은 약아빠졌다고 말했는데요. 정말로 문명은 약아빠졌습니다. 문명은 인간들의 포기된 성충동을 에너지로 삼아서, 인정받기 위한 인정투쟁으로 전환시키지요. 그래서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지지대로 해서 인간들을 마구 굴립니다. 이게 자본주의의 동력이 되지요. 인간들은 저마다 인정받기 위해서, 그리고 상실된 대상을 되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합니다. 문명이 실실 웃는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문명은 지금까지 아버지의 은유, 아버지의 이름을 통해서 자기의 이득을 최대한 살려왔지요. 문제는 아버지의 존재가 현대사회에서는 예전같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만… 프랑스 혁명 이후로 아버지 = 왕은 시민들에 의해서 목이 잘려버렸으니까요.
다시 돌아옵시다. 인간은 그렇게 상실된 대상을 되찾으려고, 아버지와 같은 존재에게 인정받으려고 고군분투하지요. 선생님이나 직장 상사나, 교수님이나… 그렇게 살아가다보면 문득 내가 정말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허함이 밀려옵니다. 왜 내가 이렇게 기계장치의 부속품처럼 살아가야 하나라는 생각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우울이 찾아옵니다. 라깡 정신분석은 이 순간을 “실재”의 출현이라고 말합니다.
증상, 그것, 실재의 출현은 다시 말하면, 잊혀졌던 “나”의 귀환입니다. 라깡이 프로이트로의 귀환을 내걸고 자기의 학파를 만들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프로이트가 죽은 이후 정신분석은 심각하게 망가져갔습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문제, 죽음충동의 문제에 집중했는데, 자아심리학파는 죽음충동의 문제를 그리 중요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또한 무의식보다 방어기제를 연구하는데 집중합니다. 방어기제는 자아가 이드의 충동을 잘 방어하려는 기제들을 말합니다. 충동이 저기서 튀어나오면 이렇게 방어하고, 저기서 튀어나오면 저렇게 방어하고, 그런 걸 연구했습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자아심리학파는 자아를 강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자아의 강화를 핵심문제로 삼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프로이트는 “천상의 힘들을 꺾을 수 없다면, 지옥을 움직이련다”같이 말했지요. 즉 천상의 힘들로 대표되는 사회의 고정관념을 꺾기 위해서라면, 지옥(무의식)의 문을 열어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겠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 정도로 무의식과 충동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꿈의 해석이라는 책 자체가 무의식의 언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연구한 책입니다. 자아가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충동을 방어하려고 하는데, 그 방어에 집중한게 아니라, 무의식의 언어들에서 나오는 충동 그 자체를 탐구하려고 했던 학자가 프로이트입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진정한 원인은 무의식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무의식, 그것, 충동의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자아심리학파는 프로이트의 배신자라고 주장하며 라깡이 자기학파를 만든 것이지요.
여기까지가 대략의 개괄이었습니다.
그런데 후기 라깡으로 가면, 상상계, 상징계, 실재로는 뭔가 설명되지 않는 것이 남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상하게 아무리 분석해도 분석되지 않는 무언가가 남았습니다. 말년의 프로이트도 이 점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정신분석 임상의 모든 지점을 재검토해야한다고 말하며 마지막 논문을 쓰고 죽었습니다. 라깡은 프로이트가 멈췄던 지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70세가 넘은 라깡은 자신의 모든 임상을 재검토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거세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가 인간을 거세한다고 말하게 됩니다. 인간은 애초에 도착적 충동을 가지고 있는 이상한 동물인데, 언어를 사용하면서, 그 충동을 거세시키고 문명을 만들게 되었다는 겁니다. 언어를 사용하면서 무의식이라는 것도 출현하게 되었고, 그리고 문명까지 만들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자기가 분열되는 처지에 이르렀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인간은 항상 무의식과 의식으로 분열되어 있으니까요. 대부분 정상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신경증자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잘 모릅니다.
라깡의 예시, 즉 어떤 남자가 자기가 너무 불륜에 대한 욕망이 있다, 그것을 고치고 싶어서 정신분석을 받으러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남성을 분석해보니, 정신분석을 받는다는 핑계로, 부인의 곁을 잠시라도 떠나고 싶었던 것이 실제 욕망이었던 것이 드러났지요. 이처럼 신경증자는 말하는 것과 말해진 것이 다릅니다. 즉 지금 나는 그걸 원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원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러한 분열이 신경증자의 대표적인 임상사례입니다.
이러한 분열된 주체, 즉 자기 충동이 뭔지 모르는 주체를 임상해보니, 라깡은 그들이 증상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증상은 고통도 주지만, 동시에 만족도 줍니다.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부모가 너무 안쓰러워서 모든 것을 다 해줍니다. 그 사람은 실제로 괴로울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으니, 그 증상은 그에게 이득도 줍니다. 이처럼 증상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고통과 주이상스(향유, 향락)입니다.
자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생톰sinthome은 증상Symptôme의 고어, 오래전 이름입니다. 라깡이 제임스 조이스에 대해서, 세미나23권에서 굳이 증상이라는 단어 대신에 생톰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라깡은 아일랜드의 대문호 제임스 조이스에 대해서 아주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칼 융이 진단했듯이 조이스는 정신분열증이라고 보일만한 요소가 많은 소설가입니다. 조이스의 대표작인 피네간의 경야에서 아주 유명한 문장, 인터넷에서도 유명한 문장을 한 번 살펴봅시다. 김종건 교수님의 번역으로요.
이게 도대체 무엇인가요? 번개가 떨어지는 순간을 묘사한 문장입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피네간의 경야를 대부분 이런 식으로 썼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국역본으로 천페이지가 넘는 책인데, 문장이 거의 이런식입니다.
라깡이 보았을 때, 제임스 조이스는 증상(생톰)을 즐기는 방향으로 밀고 나간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증상을 오히려 즐김으로써, 그것 자체와 동일시되었다. 그럼으로써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발명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설명하기 위해 이 글, “증상 조이스”를 집필한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세미나23권 : 생톰에서처럼, sinthome이라 표기하지 않고, 증상이라고 쓰고 있으니, 그대로 증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다만 독해하는 우리들은 생톰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후기 라깡의 지향이었기 때문이지요.
제임스 조이스는 소설을 쓰기 위해 새로운 단어를 만들고, 서사구조를 뒤틀며, 자기만이 이해할 수 있는, 아니 어쩌면 그도 이해하지 못할 무언가를 써내려갔습니다. 사실 이해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무엇을 욕망하냐이지요. 조이스가 욕망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그것, 그것이 말한다, 라깡이 즐겨말했던, 충동이자 무의식이 직접 말하는 경지였던 것이지요. 이로써 증상 조이스. 첫 단어에 대한 해석이 끝났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