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상 조이스(2)
Joyce le Symptôme à entendre comme Jésus la Caille
증상 조이스는 Jésus la Caille와 동등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오늘은 첫 문장을 읽어보겠습니다.
증상 조이스에 대해서는 앞서 설명을 드린바 있지요.
Symptôme, 라깡은 세미나23에서 증상Symptôme을 sinthome이라는 고어를 가져와 고쳐씁니다. 그렇다면 이 sinthome을 분절해봅시다. sin, 죄악이라는 뜻이 있고, 여기에 home는 homme와 동음이의어(옴므)이지요. 즉 죄악의 인간, 그렇게 분절됩니다. 또한, 라깡이 직접 말하기도 한 것인데요. saint성자와 homme라는 분절도 가능하지요. 따라서 텔레비지옹에서 생톰은 즉 성인되기의 과정으로 이해됩니다.
다시 말하면, 제임스 조이스는 그의 글쓰기를 통해서 구도자, 수행자와 같은 삶을 살았고, 그 지난한 수행의 과정을 거쳐 마치 성인의 위치와 같은 곳으로 나아갔다는 것이 라깡적 사고입니다. 죄악의 인간이 동시에 성인이 된다.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 알레고리이며, 우리는 생톰을 분절하여 나온 동음이의어들을 유념하며 라깡의 글을 읽어가도록 합시다.
Jésus la Caille는 프랑스의 작가 프란시스 카르코의 소설입니다. 까이유caille는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Caille는 젊은 지골로, 즉 남창입니다. 그리고 아가를 가리킬 때 쓰기도 하며, 예쁜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지요. 오가사와라 신야의 주해에 의하면, 속어적 표현으로는 비도덕적인 여성을 가리키기도 한다는군요.
그렇다면 어째서 이 둘, 증상 조이스와 Jésus la Caille는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를 기독교적 알레고리로 해석해봅시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최초의 교회공동체를 만듭니다.
루가의 복음서를 봅시다.
예수는 십자가에 죄수들과 나란히 매달립니다. 죄수는 예수를 조롱합니다. 신의 아들이라면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한 죄수는 예수를 옹호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기로 결단”합니다.
“다른 죄수는 ”너도 저분과 같은 사형 선고를 받은 주제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가 한 짓을 보아서 우리는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저분이야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이냐?“ 하고 꾸짖고는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는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이다.”하고 대답하셨다.“
루가의 복음서, 40~43장
예수는 성인입니다. 죄수는 죄악의 인간이지요. 인간은 선과 악, 그 어느 곳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양면적 존재이지요. 애초에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분열된 존재입니다. 항상 선이지만도 않고, 항상 악이지만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체의 결단입니다. 어떤 삶의 방향으로 나아갈지, 결단을 어느 방향으로 하느냐에 따라 삶의 지향이 달라집니다.
예수를 믿기로 결단한 죄수는 수치심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가 벌받을 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뉘우칩니다. 따라서 예수는 “뉘우치고 회개하는 자”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이것을 최초의 교회공동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라깡은 성자 조이스와 남창 까이유를 동등하게 취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음 구절을 보면,
c’est son nom.
그것은 그의 이름이다.
즉 성자와 죄악, 둘은 모두 인간의 다른 이름이지요. 라깡은 이 점을 기독교의 알레고리를 들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증상 조이스는 증상을 즐김으로써 성인의 경지에 오릅니다. 증상, 즉 사회의 고정관념이 길들이고, 배제시키고, 쫓아내려고 했던 그 무엇입니다. 라깡은 모든 성인을 “증상”이라고 봅니다. 또한 조이스와 까이유는 모두 사회의 아웃사이더들이지요. 오가사와라 신야의 주해에 의하면 소설의 주인공 까이유는 게이, 즉 성소수자입니다.
아웃사이더들은 사회의 고정관념에 맞서 싸우지요. 투쟁하는 삶을 살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라깡은 인간은 그의 이름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욕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가 정신분석에 대해 모든 것을 배웠다고해도 과언이 아닌 백상현 교수님이 쓴 “나는 악령의 목소리를 듣는다”를 보면, 소크라테스는 진리의 정신병에 사로잡힌 상태였습니다. 즉 소크라테스는 순수한 증상 그 자체입니다. 소크라테스는 광장을 돌아다니며, 상대방에게 뭔가를 알고 있는지를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논박을 하다보면 상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 하나는 안다고 말합니다. 고대 아테네 정치체제의 입장에서, 소크라테스는 선동가였으며, 사회의 질서를 해치고, 신을 모독하는 범죄자였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말하다가 죽습니다.
예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의 사법절차는 예수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병자, 창녀, 죄인, 사회부적응자 등등 고정관념의 질서에서 버림받은 아웃사이더들을 포용하여 그들과 함께 세계를 돌아다닙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로 알려줍니다. 로마세계는 이러한 예수의 실천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합니다.
이처럼 진리를 말하는 성인들, 그 성인들은 고정관념에서는 “증상”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철저히 배제시키고 격리시키려고 합니다. 정신분석학은 “증상”을 배제하는 사회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오히려 증상이라고 하는 것이 진리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으로부터 시작하여, 문명 자체가 증상이라고 말하지요. 가부장제라는 것 자체가 증상이며, 많은 인간들이 동의했기 때문에 보편적인 것이 됐던 것이지요. 그런데 보편, 모든 것, 전부는 반드시 배제를 포함합니다. 가부장제가 아닌 다른 가족형태를 배제하고서 성립하는 것이 바로 가부장제 시스템이었던 것이지요. 문명은 이처럼 고정관념적 질서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유한 것, 개별적인 것, 주체적인 것, 즉 진리는 증상이라고 하여 억압하고 추방시켰다. 따라서 정신분석은 항상 고정관념에 딴지를 걸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프로이트부터 이어져내려오는 전통입니다. 프로이트는 아무런 편견없이, 신경증의 원인이 성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보수적 가부장제 질서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프로이트는 성욕이 신경증의 원인이라는 발견을 끝까지 밀고 나아갔고, 정신분석학을 발명했습니다. 정신분석의 모토는 이것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발견한 것을, 진리를 밀고 나아가는 고집 혹은 주체적 결단. 그것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창안하며 살아내는 것. 그것이 주체성의 진리입니다.
그것은 그의 이름입니다. 바로 인간의 이름이지요.
성인과 죄악. 이 둘은 인간의 이름입니다. 죄악의 길로부터 우리는 성인의 길로, 아니면 성인의 길에서 죄악의 길로 갈 수도 있지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삶을 발명하며 살아내느냐에 있습니다. 증상 조이스는 그러한 발명의 새로운 발자취를 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