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치기
여보, 어머님한테 또 전화가 왔어.
당신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또 그 특유의 날카로우면서 울먹거리시는 목소리로 하소연을 하시는데,
내가 직장에서 한 시간 가까이 전화를 받느라 자리를 비우고 있느라 얼마나 난처했는지.
어머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당신은 궁금하지 않다고 하겠지만,
이젠 더 이상 내 선에서 감당하는 건 못하겠어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아.
어머님은 당신 요즘 컨디션 괜찮냐고,
늘 겨울에 체력이 부쳐서 흑염소를 챙겨 먹여야 한다고...
그 얘기를 당신 10살 때 폐렴에 걸려서 죽다 살아났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줄줄줄줄 하시는데...
일단 다 들어드리기 전까지는 당신한테든 나한테든 열 통이고 스무 통이고 계속 전화, 문자 할 걸 알아서 그냥 참고 다 들었어.
당신이야 그런 말 들으면 요새 몸 괜찮다고, 비타민이랑 챙겨 먹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 끝이겠지만,
어머님이 얘기하고 싶은 건 흑염소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당신이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이게 다 어머님 생신 때 식사 못하고 넘어간 것부터가 문제였지.
한 달 전에 당신이 회사에서 사고 쳤다고,
전에 회계 처리 잘못해 놓고 넘어간 것 때문에 아버님이 노발대발하시며 직원들 앞에서 당신 혼냈었다고 했지.
그래서 당신이 아버님이랑 마주치지 않으려고 출근도 아버님 외근 나가시는 시간에 맞춰서 늦게 하고,
덩달아 아들 너무 쥐 잡듯 잡는다고 불안해진 어머님 연락도 안 받고...
뭐 그런 일이 있으면 늘 당신은 그렇게 숨어 있곤 했지만,
그렇다고 어머님 생신날도 어물쩡 넘어가 버리는 게 말이 돼?
매년 똑같은 식당에서 식사하고 선물드리고 하면 되는 걸...
아버님이랑 마주치기 힘들 것 같아서,
어머님 삐치실 거 뻔히 예상되는데 그걸 그냥...
그래서 예전 같았으면 그런 상황에서 내가 나서서 아버님 어머님 달래고 식사 잡고 그랬을 거야.
근데 이번엔 내가 일부러 그러지 않았어.
그냥 당신한테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봤지.
근데 당신은 신경 쓰지 말라고,
회사 상황이 요새 안 좋은 걸 아니까 이해하실 거라고,
이번에 돌아온 음력 생신은 크리스마스랑 가까우니까 그때 겸사겸사 하자고?
하아... 진짜 모르고 그러는 거니?
알면서 엿 먹이는 거니?
아니면 나한테까지 혼날까 봐 눈치 보면서 둘러 대는 거니?
나한테 남은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해서 당신이 어떻게 해야 했는지 하나씩 설명을 해줄게.
물론... 당신이 회사에서 사고를 치지 않았으면 애초에 이런 상황까지 오지 않았겠지만,
그런 사고야 늘상 있어 왔던 일이니까 당신의 능력에 대해서 비난하지는 않을게.
다만, 그렇게 되면 뻔히 아버님 화내실 걸 알 텐데
40년 가까이 어떻게 그런 상황을 대처해야 하는지 알아내지 못했다는 게 미스테리지.
그럴 땐 말이야,
그냥 빨리 잘못했다고 하고 수습하려고 정신없이 바쁘게 빨빨거리는 시늉이라도 하면 아버님은 금방 풀리셔.
어머님 봐, 늘상 사고 치시고는 막 벌벌 떨면서 종종거리시니까 아버님이 더 뭐라고 안 하시잖아.
그리고 어머님을 대할 때는 어머님 말을 문자 그대로만 알아듣고 대답하지 말고, 앞뒤 맥락을 읽어야지.
흑염소 먹자는 게 니 몸보신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당신 생신 때 못한 식사를 하고 싶어 하시는 거란걸 왜 모르는 거야!?
...됐다...
얘기해 봤자 당신은 또 '다 안다'고, '알아서 한다'고 화내고 귀 닫아버리겠지.
안다는 말이 안다는 게 아니라 듣기 싫으니까 그만 말하라는 뜻이지.
그럴 때 보면 9살짜리 우리 반 남자애들이랑 어쩜 그리 똑같은지...
걔네는 애니까 귀엽기라도 하지...
내일모레 마흔 인 사람 붙잡고 아들한테 하듯 ㄱㄴㄷ을 가르치고 있는 내 모습이 참... 자괴감이 들어.
내가 이런 역할까지 해야 하나 싶고...
여보... 난 네 엄마가 아니야.
여자와 남자의 의사소통 방식은 차이가 아주 큽니다.
여자들은 관계 속에서 관심, 공감, 의존, 정보 등을 끊임없이 주고받아야 생존할 수 있다면,
남자들은 그런 게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남자들의 관계나 의사소통에는 보통 뚜렷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없으면 관계 형성이나 의사소통 자체를 시도 안 하는 경우도 아주 흔합니다.
그래서 남자끼리, 여자끼리 있을 때는 나름대로 질서 있는 모습이 만들어집니다.
남자들은 목적 지향적인 대화 방식을 통해 수직적인 관계가 형성되고, 여자들은 정서 지향적인 대화를 나누며 거미줄 같은 관계로 연결되어 지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 역시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방식으로 해소되는 것 같습니다.
여자들은 거미줄이 찢어져 나가 분리되고 다른 거미줄에 연결함으로써,
남자들은 충돌 후에 상하관계의 순위가 재정립됨으로써 상황이 정리되곤 하죠.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섞이게 되면 더 복잡한 일들이 발생을 합니다.
당연히 원시시대부터 남녀가 함께 살아온 건 맞지만,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남녀 간에 맡아서 하게 되는 일들, 사회/문화적으로 기대되는 모습이 아주 달랐습니다.
그래서 사실상 남자끼리, 여자끼리 지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죠.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성역할의 경계가 많이 모호해졌습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가정에서 비슷한 역할을 남녀가 나눠 가지고 끊임없이 만나 의사소통을 하면서 지내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그런 상황에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더 뛰어난 여자들이 돋보이고, 남자들은 헤매는 모습이 자주 관찰됩니다.
특히 결혼생활에서 남자들은 더 정신을 못 차립니다.
여자인 아내와 대화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동안 내가 그냥 엄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여자의 언어를 쓰기 시작하면서 낯설고 무서워지기 시작하죠.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남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시도를 하게 되는데, 열 번 중 여덟아홉 번은 실패를 합니다.
아내는 나에게 실망을 하고, 엄마는 나한테 화를 내는 상황이 반복되면 남자는 대화의 문을 닫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소통이 단절이 되면 관계는 악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새로운 방식의 의사소통 방식을 배워야 합니다.
여자도 남자의 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지만 그 얘기는 다른 기회에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남자의 입장에 초점을 맞춰 보겠습니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시행착오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시행착오라는 게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다양한 방법을 시도한 다음 그중에서 맞는 방법을 찾는 거지, 똑같은 방법으로 주야장천 반복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죠.
자기 나라 언어밖에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외국에 가서 "물! 물! 무~울! 물 달라고 물!" 하면서 100가지 억양으로 '물'이라는 단어를 얘기해 봐야 통할 리가 없습니다.
손짓발짓 바디랭귀지, 의성어, 의태어, 다른 외국어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야 그나마 가능성이 생기죠.
게다가 듣고 있는 상대방이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말로 말하지 못할 거면 꺼져라."는 식으로 나온다면, 그 사람을 붙잡고 더 이상 얘기하기 싫어지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는 없어지겠죠.
결국 외국어에 능숙한 누군가가 새로운 말을 가르쳐주고, 틀린 말을 고쳐주며, 인내심을 가지고 반복해서 연습을 시켜준다면 조금씩 현지인들과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을 겁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대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남녀 관계에서, 여자는 남자들에게 마치 외국인이나 어린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듯이,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하나 쉽고 구체적으로 가르쳐줘야 합니다.
왜 종종 남편을 큰아들이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많이 있잖아요? (여기엔 다른 이유들도 많지만...)
1. 난 지금 상황에 대한 감정이 이렇다.
2.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3. 그래서 이런 식으로 표현을 했고,
4. 그에 대해서 내가 기대한 반응은 어떤 것이다.
5. 다음부터는 " _________ ." 라고 얘기를 하면 된다.
이렇게 단계별로 나누어 매뉴얼을 만들어 주세요.
(남자들은 매뉴얼이 있어야 합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여러 상황에서 반복합니다.
'이런 것까지 말해 줘야 해?' 하는 생각은 버리세요.
상대는 외국 어린이라구요!
인내심이 잘 발휘가 안 되는 분들 중 일부는 저 흐름을 스스로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고, 자신의 마음을 분석하는 연습도 하면 좋습니다.
반복해서 가르쳐 주면서 처음에는 그냥 앵무새처럼 따라 하도록 하세요.
그러다 보면 스스로 공식을 터득하여 응용문제도 풀 줄 알게 됩니다.
여자가 가르쳐 주려고 하다보면 남자가 자존심 상해 할 것입니다.
됐다고,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그만 얘기 하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넌 그게 문제다.'라는 지적만 들어올 때보다, '이게 문제니까 이렇게 해보자.'하는 식으로 지적과 대안이 함께 제시될 때 남자의 자존심은 좀 더 잘 버텨 주고
변화되는 모습에 대해 확실한 칭찬을 받게 되면, 남자의 발전은 가속화 됩니다.
이런 과정들이 고생스러울지라도, 한번 잘 가르쳐 놓고 스스로 곧잘 하도록 해 놓으면 남은 날들 동안 엄마 역할을 해야 하는 수고는 상당히 줄어들 것입니다. (없어지진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