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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낫밷 May 26. 2024

나는 화나면 밥부터 먹고,
아내는 화나면 잠부터 잔다

원인 모를 감정을 잘 다스리기

지금은 저녁 9시 21분. 


팀원의 실수로 예기치 않게 야근을 하게 되어서 저녁식사도 하지 못한 채 8시 반까지 뒷수습을 하고서 겨우 집에 들어왔다. 


러시아워 때만큼 붐비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앉을자리가 없는 지하철에서 내내 서서 오느라 평소보다 허리가 더 끊어질 것 같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집 안에 발을 내딛는 순간 아이의 유치원 가방과 대충 벗어 놓은 잠바가 발에 치인다. 


그리고는 바닥에는 아이 방에 있어야 할 베개며 장난감, 블럭 등이 거실까지 발 디딜 틈 없이 널브러져 있다. 


안방에는 화장도 지우지 못하고 숨을 헐떡거리며 누워 있는 아내의 모습이 보이고, 

아이는 저녁에 먹은 카레 자국이 온통 스며져 있는 식탁 위에 색종이 십수 장을 펼쳐 놓고 종이 접기에 몰두해 있는 모습이다. 


여느 때와 같은 맞벌이 부부의 저녁 풍경이지만, 


오. 늘. 따. 라. 왠. 지. 

짜증이 너무 치밀어 오른다...

 


온 집안에 어질러져 있는 물건들이며, 음식 찌꺼기가 묻은 색종이며, 쌓여 있는 설거지며,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치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단전에서 분노가 치민다. 


집에 들어오는 아빠를 반갑게 쳐다보던 아이에게 소리를 빽 지른다.



"너는 나이가 몇 갠데 유치원에 갔다 왔으면 가방 정리해 놓아야지!
그리고 아직까지 그렇게 흘리면서 먹으면 어떡해!
얼른 이 블럭 다 주워서 블럭통에 넣어 놔!"



그러고는 아내가 좀비처럼 누워 있는 안방에 들어서며 가방과 외투를 벗어 바닥에 던지며 꽉 깨물어진 이빨 사이로 낮게 읊조려진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애가 씻지도 않고 있어? 일찍 왔으면 할 수 있는 건 좀 해 놓아야 할 것 아냐..."


좀비였던 아내는 갑자기 눈에 불이 번쩍 들어오며 서서히 일어나 도깨비 같은 얼굴로 서서히 변하며 대답하였다. 


"이제야 들어와서 한다는 말이, 뭐?"



(그러고 밤새 싸웠다고 한다...)






사람이 즐거움, 슬픔, 두려움, 분노, 혐오감, 놀람 등의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보통 어떤 이유 때문에 감정이 뒤따라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맛있는 것을 먹어서 즐겁고, 

시험을 망쳐서 슬프고, 

직장 상사가 못 살게 굴어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는 식으로 말이죠.  


충분히 합당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실제로는 그와 반대로 감정이 먼저 나타나고 그에 따라 이유가 생겨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뭔가 잘 납득이 되지 않는 얘기 같죠?



이런 경우를 한 번 봅시다,


엊그제 15년간 키운 반려견이 하늘나라로 떠 상황에서는, 

엄청나게 유명하고 맛있는 케이크를 사 먹어도 그다지 즐거운 마음이 들지 않을 거예요.


방금 전에 로또 1등이 당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눈앞에서 직장 상사가 아무리 모질게 굴어도 그다지 타격이 없을 겁니다.


이처럼 이유(상황, 사건, 생각 등)가 있다고 그에 알맞은 감정이 반드시 뒤따라오지 않는 경우는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가 '감정'이라고 느끼는 건, 현재의 우리 몸의 상태와 그의 변화;


심장은 얼마나 빨리 뛰는지,

근육에 힘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지,

몸이 더운지 추운지,

어젯밤에 잠을 얼마나 잘 잤는지,

밥 먹은 지 얼마나 지났는지,

생리 기간이라 아랫배와 허리에 통증이 얼마큼 있는지,

비를 맞고 오느라 신발 속의 양말이 기분 나쁘게 축축해져 있는지...


등의 감각들이 뇌에 입력되면, 

그것을 종합하여 현재 '이러한 감정이다'라고 해석하여 우리가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명확한 사건이 발생하여 그로 인해 즉각적으로 신체 변화가 벌어진다면, 

그 이유 때문에 내가 기쁘거나 슬프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인식을 하겠지만


특별한 외부적인 사건이나 원인과 무관하게라도 내 몸의 상태가 변화한다면, 

우리는 이에 따라 특정한 색깔의 감정을 이미 느끼고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생각하는 동물'인 우리는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에 대한 이유 급하게 탐색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었는지, 뭐가 잘못되었는지,

내 주변에 누가 있는지, 그 사람이 아까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오늘이 아니라면 어제, 그저께, 지난주, 10년 전에 있었던 일 중에 뭔가 잘못된 건 없었는지...


그러다 보면 무언가에 딱 꽂혀서 '이거다!'라는 느낌이 강하게 오기 마련인데...


그중에서는 나름대로 납득할 만한 해석들도 있겠으나, 

때로는 엉뚱한 이유를 찾게 될 때도 자주 있죠.



마치 위의 이야기에서처럼 '아이들이 물건을 어질러 놓아서 화가 난다.' 같은 결론을 내게 되죠. 


그러면 이어서 아주 논리적인 흐름으로 아이들을 혼내거나, 물건을 치우는 행동을 하기 시작하는데... 


내가 화가 난 이유는 애초에 그게 아니라 '밥을 먹지 못하고 몸이 피곤하기 때문'이기 때문에, 

그런 행동들은 화를 가라앉히는데 도움이 별로 안 됩니다. 


오히려 굶주리고 피곤한 몸으로 에너지를 더 쓰게 되면서 짜증은 오히려 더 심해지죠.



상태가 더 나빠져 불안장애나 우울증 등으로 내 상황과 의지와 상관없이 나쁜 감정이 떠나지 못하게 되면,

나의 생각과 의지와 행동이 모두 나쁜 감정에 지배당하게 됩니다. 


그러면 보나 마나 엉뚱한 이유에 꽂혀 그걸 해결한답시고 무리하게 달려들며 상황을 악화시키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쁜 감정이 들 때 그 감정이 드는 이유를 찾고 해결하려고 애를 쓰기에 앞서, 

일단 감정 그 자체를; 좋지 않은 신체 상태를 가라앉히기 위해 먼저 노력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많은 경우에 감정이 가라앉으면 해결해야 할 문제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이죠.



누군가와 다툼이 생겼을 때도 먼저 시간을 좀 두고 각자 화를 가라앉힌 다음에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하죠?

화가 가라앉지 않은 채, 눈에 불을 켜고 화낼 이유를 찾으며 상대방과 얘기를 하다 보면 

그 사람이 하는 말의 내용이나 논리뿐 아니라 말투, 표정, 콧구멍에서 삐져나온 코털(!)까지 짜증이 나게 된답니다.


위 이야기에서 만약 집에 들어오자마자 빨리 밥부터 간단하게 챙겨 먹고 샤워까지 하고 나온다면?

 
그리 하여 혈당이 충분히 오르고 근육이 이완되고 피부 온도가 안정된다면?


'애들이 어지르고 노니까 애들이지. 아내도 피곤할 텐데 그래도 애 밥 먹이고 분리수거까지는 해 놓았네...'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애들과 아내에게 났던 짜증이 약간의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짜증이든 분노든 답답함이든 불쾌한 감정 때문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나를 힘들게 하는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면, 


목이 마르면 물을 한 잔 떠 드시고요, 

바빠서 끼니를 못 챙겼다면 간식을 찾아드시고, 

그 장소에서 벗어나 10분 정도 산책을 해 보시거나,

요 며칠 늦게까지 잠을 못 잤다면 오늘은 일단 정리하고 잠자리에 일찍 들어 보세요.


(그런데 어떻게 해도 효과가 없다면, 병원에 찾아가야 할 신호일 수도 있으니 참고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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