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 모음집’에서 ‘실행 계약서’로, 4년 뒤 점검 가능한 문장
[사라지는 건 인구가 아니라 정치다] 시리즈 6
지방선거 때마다 거리는 공약으로 가득해진다. 벽보와 현수막, 선거공보와 SNS에는 좋은 말이 넘쳐난다. ‘아이 키우기 좋은 도시’, ‘어르신이 행복한 농촌’, ‘청년이 돌아오는 지역’ 같은 문구는 어느 지역에서나 비슷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선거가 끝나고 몇 해가 지나면, 이 말들 가운데 무엇이 실제로 지켜졌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공약이 너무 많았거나, 너무 추상적이었거나, 애초에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장은 공약을 그런 ‘좋은 말 모음집’ 상태에서 꺼내, ‘실행 계약서’에 가깝게 바꾸려는 시도다. 공약을 쓰는 후보와 캠프, 공약을 보고 심사하는 의회와 언론, 공약에 기대를 걸고 투표하는 주민이 같은 문장을 보고도 각자 다른 이야기를 떠올리는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다. 공약이 계약이 되려면, 적어도 “누가, 무엇을, 언제까지, 어느 정도, 어떤 방식으로 하겠다”는 기본 틀이 눈에 들어와야 한다. 그리고 4년 뒤에 다시 펼쳐 보았을 때, 그 약속이 어느 정도 지켜졌는지 점검할 수 있는 기준이 함께 따라붙어야 한다.
지금 지방정치에서 공약이 명함처럼 소비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공약을 ‘선거 때 한 번 나눠주고 마는 소개서’ 정도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명함에는 이름과 얼굴, 소속과 직함이 적혀 있다. 나를 한 번 기억해 달라는 신호에 가깝다. 많은 후보의 공약집도 이와 비슷하다. 지역에 대한 애정, 노력하겠다는 각오, 열심히 뛰겠다는 마음가짐이 강조된다. 그러나 명함만으로는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떤 일을, 어떤 순서로, 어느 수준까지 하겠다는지 알 수 없다. 공약을 그렇게 쓰면, 선거가 끝난 뒤에도 서로 책임을 물 수 있는 연결고리가 남지 않는다.
반대로 공약을 계약으로 바라보면 문장부터 달라진다. 계약서에는 상대방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가 비교적 분명하게 적힌다. 기간, 내용, 범위, 조건이 빠지면 계약이 성립하지 않는다. 공약도 마찬가지다. ‘어르신이 행복한 도시를 만들겠다’는 말만으로는 계약이 되지 않는다. 어떤 어르신을, 어떤 변화로, 어느 정도 수준까지, 몇 년 안에 만들겠다는지까지 적혀야 비로소 유권자와 후보 사이에 약속이 생긴다. 그 약속이 어긋났을 때는 왜 어긋났는지 설명할 책임도 따라온다.
현장에서 보면 이 차이는 더 분명해진다. 어느 지역 군수는 선거 때 ‘농민이 웃는 농촌을 만들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공보물에는 벼 이삭 사진과 함께 농업 소득 증대, 판로 확대, 청년 농부 지원 등 같은 문장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당선 이후 실제로 한 일은, 기존 보조사업의 예산을 조금 늘리고, 직거래 장터를 한두 번 더 연 것에 그쳤다. 농민 입장에서는 ‘우리 동네 농업이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를 떠올릴 만한 그림이 없었다. 처음부터 공약이 “농민의 연 소득을 4년 동안 평균 얼마까지 끌어올리겠다”, “○○ 작목의 판로를 어디까지 확대하겠다”, “청년 농부가 이 지역에서 농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어떤 조건을 만들겠다”처럼 적혀 있었다면, 농민들도 4년 뒤 무엇을 기준으로 평가해야 할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어느 시에서는 단순해 보이는 공약이 4년 동안 실제 변화를 만들었다. 한 후보는 “초등학생 돌봄 공백을 줄이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문장은 이랬다. “임기 4년 동안 모든 초등학교에 돌봄교실을 최소 2개 이상 확보하고, 저녁 7시까지 운영하는 학교를 현재 ○곳에서 ○곳으로 늘리겠다.” 뒤에는 “이를 위해 연간 ○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고, 학교·지자체·지역아동센터가 함께 운영협약을 맺겠다”고 적혀 있었다. 선거 당시에는 눈에 확 띄는 슬로건은 아니었지만, 임기 말이 되었을 때 이 도시는 실제로 돌봄교실 수와 운영시간이 공약대로 바뀌어 있었다. 이 공약은 처음부터 ‘좋은 말’이 아니라 ‘점검 가능한 계약’ 형태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행정과 의회, 학교가 부담을 느끼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이 두 사례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바로 공약 설계의 7가지 원칙이다. 아래에서는 이 7가지 원칙을 하나씩 짚어보면서,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본다.
첫째, 공약은 ‘좋은 말’이 아니라 구체적인 장면에서 출발해야 한다.
‘청년이 떠나지 않는 도시’라는 문장을 공약으로 쓰고 싶다면, 먼저 청년의 어느 순간을 바꾸겠다는 것인지 정해야 한다. 퇴근 이후에 갈 곳이 없는 문제인지, 월세가 너무 비싼 문제인지, 지역 내 일자리의 질이 나쁜 문제인지, 아니면 지역 밖에서 살아도 이 지역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통로가 부족한 문제인지 짚어보아야 한다. 어느 중소도시 캠프에서는 “청년이 떠나는 도시를 바꾸겠다”는 슬로건을 놓고 밤늦게까지 회의를 했다. 처음에는 ‘청년문화센터 건립’, ‘청년 페스티벌 개최’ 같은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그러나 논의가 길어지자, 한 참모가 “우리가 바꾸려는 장면을 하나만 정하자. 퇴근한 청년이 오늘 이 도시에서 머무르느냐, 바로 떠나느냐”라고 정리했다. 그 순간부터 공약은 ‘퇴근 이후 머무를 수 있는 조건’이라는 구체적인 장면을 중심으로 다시 묶이기 시작했다. 같은 말이라도, 어떤 장면을 바꾸겠다는 것인지가 분명해지는 순간 공약의 방향이 선다.
둘째, 공약은 ‘사업 목록’이 아니라 ‘문제 해결 과정’으로 묶어야 한다.
많은 공약집은 사업 이름이 빼곡한 메뉴판에 가깝다. ‘○○ 행복센터 건립’, ‘△△ 축제 활성화’, ‘□□ 테마거리 조성’ 같은 문장이 페이지마다 나열된다. 겉으로는 열심히 준비한 흔적이지만, 이 목록만 읽어서는 후보가 지역의 어떤 문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가려는지 보이지 않는다. 공약을 계약으로 만들려면, 먼저 ‘이 지역에서 꼭 풀어야 할 문제 세 가지’를 정해야 한다. 그리고 각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안에 사업을 배치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고령 농촌에서 혼자 사는 노인 돌봄 문제’를 핵심 문제로 잡았다면, ‘방문간호 인력 확충’, ‘마을 단위 안부 확인 시스템’, ‘응급 이송 지원’ 등의 사업을 따로 쓰지 말고 ‘고령 농촌 돌봄망 구축’이라는 한 축으로 엮어 보여주는 편이 낫다. 주민 입장에서는 왜 이런 사업이 이 순서로 들어왔는지 이해할 수 있고, 나중에 점검할 때도 그 문제를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된다.
셋째, 공약에는 ‘이번 4년 안에 끝낼 일’과 ‘이번 4년 동안 시작만 할 일’이 구분되어야 한다.
공약집에는 자주 초대형 도로·철도 사업, 대규모 공공시설 건립, 법·제도 개정이 필요한 과제까지 한 임기 안에 다 해내겠다는 식의 문장이 섞여 있다. 주민에게는 든든하게 들릴지 몰라도, 실제로 집행하는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약속이다. 이런 공약은 4년 뒤에 무엇을 가지고 평가해야 할지도 모호하게 만든다. 공약을 계약처럼 쓰려면, ‘이번 임기 안에 끝까지 책임질 일’과 ‘이번 임기에는 설계와 기반만 만들고 다음 세대에 넘겨야 할 일’을 분리해 적어야 한다. 예를 들어 노후 시가지 재생사업이라면, 이번 임기 안에 할 일로는 기본계획 수립, 주민협의체 구성, 시범사업 착수, 관련 조례 제정까지를 명시하고, 전체 완성 시점은 10년 혹은 20년 뒤로 제시하는 식이다. 그러면 유권자는 4년 뒤에 무엇을 기준으로 이 약속을 평가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다.
넷째, 숫자는 ‘많이’가 아니라 ‘확인 가능하게’ 넣어야 한다.
숫자가 들어간 공약은 눈에 잘 띈다. 그래서 ‘청년 일자리 1만 개 창출’, ‘관광객 2배 확대’ 같은 문장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근거 없이 큰 숫자만 세게 쓰면, 선거 때는 인상이 강해지지만 나중에는 책임을 피하기 쉬운 문장이 된다. 계약으로서의 공약에 필요한 숫자는 과장된 목표치가 아니라 변화의 방향과 속도를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청년 일자리 1만 개’ 대신 “청년 정규직 채용을 매년 ○○명씩 늘리고, 4년 동안 누적 ○○명까지 끌어올리겠다”라고 쓰는 편이 더 정직하다. ‘관광객 2배’ 대신 “숙박 관광객 비율을 지금 ○%에서 4년 뒤 ○%로 올리겠다”, “재방문율을 ○%에서 ○%로 높이겠다”처럼 지역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지표를 붙이는 것이 낫다. 실제로 어떤 지자체에서는 ‘관광객 수는 늘었지만, 머무는 시간과 소비는 그대로인 관광정책’ 때문에 오히려 주민 피로감만 커졌다는 평가가 나왔고, 그 뒤로는 공약에서 방문객 숫자보다 숙박률과 지역 소비 비중을 더 중요하게 적기 시작했다.
다섯째, 공약에는 예산과 재원 조달 방식을 함께 적어야 한다.
공약을 계약이라고 했을 때, 돈의 출처는 계약의 가장 현실적인 조건이다. 같은 ‘아이 돌봄 확대’라도 읍·면 단위 돌봄센터를 새로 짓겠다는 것인지, 기존 시설의 운영시간을 늘리겠다는 것인지, 학교와 마을시설을 연계하겠다는 것인지에 따라 들어가는 예산과 책임 주체가 달라진다. 공약 단계에서 “이 사업에는 연간 어느 정도의 예산이 필요하고, 그 중 얼마를 지방재정에서, 얼마를 국·도비와 공모사업으로, 얼마를 민간 협력으로 조달하겠다”는 정도까지 적어두면, 선거 이후 행정과 의회가 논의를 시작할 때 기준점이 생긴다. 어떤 시에서는 선거 때 공약집 말미에 ‘공약별 재정 소요와 재원 계획’ 표를 함께 붙였다. 임기 초에 재정 여건이 예상보다 나빠지자 일부 공약의 속도를 조절해야 했지만, 주민과의 설명 자리에서 ‘어떤 공약은 왜 우선하고, 어떤 공약은 왜 뒤로 미루는지’를 비교적 납득 가능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여섯째, 공약은 ‘후보 개인의 약속’이 아니라 ‘팀과 지역의 계획’으로 써야 한다.
지방선거에서는 단체장 후보의 이름이 가장 크게 보이고, 공약집은 대개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채워진다. 그러나 실제로 공약을 실행하는 과정에는 의회, 공무원, 주민, 민간단체가 모두 얽혀 있다. 공약을 계약으로 본다면 ‘누가 함께 할 것인지’를 공약 안에 드러내야 한다. “○○ 정책협의회를 만들어 의회와 주민, 전문가가 함께 설계하겠다”, “읍·면·동 단위 주민회의를 정례화해 공약 실행 순서를 함께 정하겠다” 같은 문장은, 공약이 선거 직후 몇 사람의 판단에 따라 임의로 수정되거나 조용히 사라지는 일을 줄여준다. 실제로 어떤 군에서는 선거 때 ‘농업정책 주민협의체’를 공약으로 제시했고, 임기 첫해에 이 협의체를 구성해 공약 실행 순서를 다시 짰다. 그 결과 몇몇 사업은 주민 논의를 거쳐 방향이 수정되었지만, ‘함께 바꾼 공약’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오히려 정치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기도 했다.
일곱째, 공약을 쓸 때부터 ‘4년 뒤 점검 장면’을 함께 그려야 한다.
공약이 명함에 머무르면, 선거가 끝난 뒤에는 그 문서를 다시 꺼낼 일이 없다. 그러나 공약이 계약이라면, 계약서를 다시 펼쳐 보는 날이 전제된다. 후보와 캠프는 공약을 작성할 때 ‘4년 뒤, 이 공약을 가지고 어디에서 누구와 점검회를 열 것인지’, ‘어떤 자료와 지표를 가지고 설명할 것인지’까지 미리 떠올려야 한다. 공약집 맨 뒤에 “공약 이행 점검회의를 매년 몇 월에, 어떤 형식으로, 누구와 함께 열겠다”는 약속을 넣는 것도 한 방법이다. 실제로 몇몇 지자체에서는 ‘공약 이행 주민보고회’를 매년 열고 있다. 공약별 이행률과 예산 집행 현황을 공개하고, 왜 계획보다 늦어졌는지, 무엇을 바꾸어야 할지 주민과 함께 논의한다. 주민 입장에서는 ‘그냥 말만 하고 끝난 줄 알았던 약속이 실제로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고, 정치인 입장에서는 ‘다음 선거 때 무엇을 근거로 평가를 받게 될지’를 미리 의식하게 된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공약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시간이 부족하다. 밤새워 키워드를 모으고, 여러 사람의 아이디어를 붙여 짧은 문장으로 정리해야 한다. 그래서 공약이 자꾸 ‘좋은 말 모음집’ 쪽으로 기울어지기 쉽다. 그러나 바로 그때가 공약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이 문장이 명함인지, 계약인지’를 물어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명함은 선거가 끝나면 버려지지만, 계약서는 임기가 끝날 때까지 남는다. 공약을 명함으로 만드는 것은 쉽다. 지역에서 흔히 들리는 좋은 말들을 모아 예쁜 문장으로 묶으면 된다. 대신 그런 공약은 선거가 끝나는 순간부터 힘을 잃는다.
공약을 계약으로 쓰는 일은 더 어렵고, 더 많은 설명과 계산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한 번 잘 만들어 두면, 선거가 끝난 뒤에도 후보와 캠프, 의회와 공무원, 주민 모두가 다시 참고할 수 있는 ‘4년짜리 설계도’가 된다. 이 장에서 정리한 7대 원칙은 거창한 이론이 아니다. 공약을 한 줄 쓰더라도 ‘이 말로 4년 뒤에 서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를 한 번 더 묻자는 제안에 가깝다. 지방정치가 말로만 소멸을 걱정하는 자리가 아니라, 실제로 마을의 미래를 설계하는 자리가 되려면 공약부터 달라져야 한다. 공약이 달라지면 선거가 달라지고, 선거가 달라지면 임기 동안의 시간 사용 방식이 달라진다. 공약을 다시 쓰는 일은 결국 지방정치를 다시 쓰는 일의 출발점이다.
(우지영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