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보> 리뷰 : 인간이길 포기한 예술

by 글둥


영화의 마지막, 무대 위 정점에 선 키쿠오의 표정에는 환희가 없었다. 그곳엔 오직 정점의 고독과 돌아갈 곳 없는 자의 허무만이 기괴하게 엉켜 있었을 뿐이다. 그 서늘한 표정을 보는 순간, 관객은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잔인한 형벌이 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그가 무대 위에서 빚어낸 아름다움을 두고 국보급 아름다움이라 칭찬했다. 분명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그 찰나만큼은 찬사를 아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상영관을 나선 뒤 밀려오는 이 이상한 찝찝함과 허한 느낌을 나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지난 3시간 동안 스크린을 통해 목격한 광경은 숭고한 예술의 탄생이라기 보다는 한 남자의 인생이 기구하게 바스라져 가는 참혹한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불쾌한 여운의 정체는 키쿠오가 도달한 아름다움이 생명력을 잃은 박제된 미라는 점에 있다. 그는 가부키의 정수인 '온나가타'가 되기 위해 자신의 본성과 인간으로서의 삶을 스스로 도려냈다. 야쿠자의 아들이라는 낙인과 결핍을 지우고 완벽한 가상의 존재로 거듭날수록, 인간 키쿠오의 자리는 메말라갔다. 나를 더욱 찝찝하게 만든 것은 그를 향한 주변의 시선, 특히 그의 딸이 던진 기괴한 인정이었다. "아버지로서는 싫었지만, 무대 위의 아버지만큼은 박수를 치고 싶다"는 그 말은 키쿠오에게 내린 가장 잔혹한 확인 사살과 같다. 천륜조차 예술적 배역 아래 종속되어버린 이 비정상적인 관계는, 키쿠오가 쌓아 올린 예술의 성이 사실은 인간의 잔해 위에 세워진 폐허임을 그대로 증명한다.





IMG%EF%BC%BF0919.JPG?type=w580





이 처절한 비극조차 예술적 승화이자 아름다움이라고 감싸고 싶을지도 모른다. 만약 누군가 이 모든 파괴를 통한 국보의 지위와 그의 춤사위를 아름다움이라 정의한다면 나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최소한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최소한 인간의 삶을 통째로 제물 삼아 얻어내는 이런 끔찍한 모습은 아니라는 점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인간의 삶을 긍정하는 데서 나와야지, 인간을 지워버린 자리에 남은 인공적인 광채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마침내 키쿠오가 보게 된 눈 내리는 풍경은 그가 그토록 원하던 미학적 완성일까, 아니면 단절된 고독의 결정체일까. 그 풍경에 대해 단정적인 결단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안에는 양자의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을 것이며, 그것이 결코 '완전한 아름다움'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 눈부신 풍경은 그가 잃어버린 수많은 인간적 가치들과 맞바꾼 차가운 보상에 불과하다.



극 중 흐르는 OST 'Luminance'의 가사를 곱씹어보면, 이 노래는 삶을 잃어버린 채 오직 '예술인'으로서만 기능하게 된 그의 메마른 영혼을 간신히 위로하는 노래처럼 들린다. 빛(Luminance)이라는 제목이 무색하게도, 그 선율은 정점에 선 인간의 영광을 찬양하기보다 홀로 남겨진 국보의 고독을 쓸쓸히 어루만질 뿐이다. 예술이 인간의 삶을 압도하고 끝내 집어삼켰을 때, 그 결과물은 더 이상 보물이 아닌 비극의 증거일 뿐이다. 정점에서 마주한 키쿠오의 고독하고 공허한 얼굴은 우리가 예술의 숭고함에 환호하느라 외면했던 '인간'의 마지막 비명이었다. 우리는 이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누군가의 인생을 이토록 기구하고 끔찍하게 파괴하며 얻어낸 결과를 우리는 진정 '국보'라 부를 수 있는가.




작가의 이전글영화관의 낭만이라는 가스라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