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세기경, 플라톤은 그의 저서 『파이드로스(Phaedrus)』를 통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기술 비판 중 하나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이집트의 신 테우트(Theuth)가 타무스(Thamus) 왕에게 '문자'라는 새로운 발명품을 가져다준 일화를 들려준다….
나일강의 뜨거운 태양이 파라오의 궁전 기둥마다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던 오후였다. 지혜의 신 테우트는 흥분으로 가슴이 고동치는 것을 느끼며 왕의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인류의 운명을 영원히 바꿀 기이한 도구가 들려 있었다.
폐하, 이것은 인류의 기억을 돕고 지혜를 증진할 비약(Pharmakon)입니다.
테우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제시한 것은 인류 최초의 '문자'였다. 그러나 그것을 내려다보는 타무스 왕의 눈빛은 서늘했다. 왕은 알고 있었다. 기록되는 순간 사유는 멈추고, 종이 위에 고착된 지식은 더 이상 살아있는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는 것을.
너는 기억의 보조 도구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망각의 씨앗을 가져왔구나.
왕의 나직한 경고는 궁전의 벽면을 타고 흘러 수천 년의 시간을 관통하는 긴 메아리가 되었다. 기록된 것은 죽은 것이며,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자들은 지혜롭다는 착각 속에 빠져들 것이라는 그 서늘한 통찰은, 이제 2026년의 우리가 마주한 'AI 슬롭(Slop)'이라는 거대한 소음 속에서 다시금 선명한 공포로 부활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AI 슬롭(Slop)이라 부르는 저질 콘텐츠의 범람을 보며 느끼는 알 수 없는 불쾌감은 2,400년 전 타무스 왕이 느꼈던 공포와 그 결을 같이한다.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기득권층의 지식 체계와 기존의 질서를 수호하는 이들은 그것이 가져올 지적 열화와 가치 상실을 경계해 왔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단순한 거부감을 넘어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피로감이 단순히 신기술이 자리를 잡기 전의 과도기적 진통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인류의 사유 체계와 지식 생태계가 회복 불가능한 오염의 길로 들어선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사실 인류 지성사의 모든 변곡점 뒤에는 항상 당대의 '슬롭'이 존재했다. 15세기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가 등장했을 때, 지식인 에라스무스는 새로운 책의 무리가 우리를 괴롭힌다며 인쇄술이 가져온 지식의 과잉을 비판했다. 활판 인쇄는 성경과 같은 숭고한 텍스트뿐만 아니라 선정적인 대중 소설과 검증되지 않은 의학 정보를 담은 조잡한 팜플렛들을 쏟아냈고, 당시 엘리트들은 이를 정보의 타락이라 불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저급한 종이 더미들은 인류의 문해율을 폭발적으로 높였고 지식의 독점을 깨뜨려 근대 시민 사회를 탄생시킨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19세기 사진 기술이 등장했을 때도 비슷하게 반복되었다.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사진을 가리켜 예술의 가장 치명적인 적이자 재능 없는 자들의 피난처라고 비난했다. 인간의 손이 아닌 기계가 렌즈를 통해 현실을 복제하는 행위는 고귀한 화가의 정신과 예술적 아우라를 훼손하는 기술적 슬롭에 불과하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사진은 결국 화가를 단순한 재현의 의무에서 해방시켰고, 인상주의와 추상화라는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여는 촉매제가 되었다. 20세기의 텔레비전 역시 바보 상자라는 멸칭을 얻으며 수동적인 대중을 양산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초기 인터넷은 정보의 쓰레기장이라는 오명을 썼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저질 콘텐츠의 범람은 기술이 대중화되고 정보의 민주화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과정과 같았다. 즉, 저질 콘텐츠의 등장은 그 기술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보편화되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작년부터 온라인 공간을 본격적으로 점령하기 시작한 AI 슬롭은 그 궤를 달리한다. 생성형 AI가 인간의 최소한의 비판적 개입 없이 기계적으로 뱉어낸 이 저품질 콘텐츠들은 콘텐츠 생산의 한계 비용을 거의 영(0)으로 만들었다. 이제 누구나 프롬프트의 입력과 클릭 몇 번으로 그럴듯한 문장과 화려한 이미지를 무한대로 복제할 수 있게 되자, 인터넷은 맥락 없는 정보들의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가 되었다. 최근 구글의 검색 품질 하락 논란은 이러한 위협을 여실히 보여준다. AI 생성 텍스트들이 검색 엔진 최적화를 통해 상위 노출을 독점하면서, 사용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정보를 찾기 위해 수많은 광고성 슬롭을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아마존 킨들 스토어에서는 AI가 쓴 무의미한 전자책들이 베스트셀러 순위를 교란하고, 소셜 미디어에서는 기계가 만들고 기계가 반응하는 기괴한 이미지들이 범람한다. 나 역시 처음에는 이 무의미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본능적인 거부감과 상실감을 느꼈다.
문제는 많은 낙관론자가 "과거에도 그랬으니 이번에도 결국 적응할 것"이라 주장하며 AI 혁명을 이전의 혁명들과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현대 AI 기술의 특수성을 간과한 논리적 오류일 수 있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AI 슬롭은 이전의 저질 콘텐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위협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차이는 바로 '생산 주체의 실종'에 있다. 과거의 조잡한 소설이나 찌라시 뒤에는 비록 실력은 낮을지언정 명확한 목적을 가진 인간 작가가 있었다. 그러나 AI 슬롭은 인간의 의도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알고리즘이 기계적 보상을 얻기 위해 스스로 생산하고 배포한다. 인간이 읽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기계가 읽게 하기 위해 기계가 쓰는 기이한 순환 구조다. 이는 인류의 대화 영역 자체를 유령들이 점령한다는 죽은 인터넷 이론(Dead Internet Theory)을 현실화하고 있다. 인터넷 트래픽의 절반 이상이 인간이 아닌 기계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향유하는 디지털 문화의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폭로한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지식 생태계의 자가 오염인 '모델 붕괴 현상이다. 2024년 학술지 『Nature』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AI가 생성한 데이터를 차세대 AI가 다시 학습할 때 지식의 다양성이 급격히 사라지고 결국 무의미한 소음만을 내뱉게 되는 퇴화가 관찰되었다. 과거 인쇄술이 아무리 저급한 책을 찍어냈어도 종이 자체가 오염되거나 인간의 지능이 직접적으로 변질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AI는 인터넷상의 데이터를 식량 삼아 자라난다. 인터넷이 AI 슬롭으로 가득 차면 AI는 자신이 뱉어낸 오염된 정보를 다시 학습하며 지식의 원천 자체를 기형화한다. 이는 인류가 수천 년간 쌓아온 지식의 보고에 독을 푸는 것과 같다. 또한 인간 작가와는 비교할 수 없는 AI의 무한한 생성 속도는 양질의 정보를 물리적으로 질식시켜 폐기하는 현상을 초래한다. 생산 비용이 사라진 시대의 정보는 가치를 잃고, 진실을 가려내는 데 드는 비용은 무한대로 높아져 결국 '정보의 암흑기'를 불러올 위험이 크다.
결국 AI 슬롭에 대한 무지성적인 혐오나 무비판적인 수용 모두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 거대한 기술적 변곡점을 파괴하거나 되돌릴 수 없으며, 기술은 이미 우리 삶의 필연적인 일부가 되었다. 이 흐름을 거부하는 것은 문자의 발명 이후 암송의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만큼이나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 혼란 속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 하는 점이다. 미래의 주도권은 '큐레이션(Curation)의 권위'를 다시 세우는 자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보가 귀했던 시대에는 생산이 곧 힘이었으나, 슬롭이 넘쳐나는 시대에는 수많은 정보 중 진위를 가려내고 맥락을 부여하는 필터링 능력이 최고의 권력이 된다. 단순히 지식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보가 인간의 사유를 거쳐 나온 것인지를 감별해내는 능력이 현대인의 핵심 경쟁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AI를 거부하는 러다이트가 될 것이 아니라, AI가 뱉어내는 슬롭의 바다에서 인간의 진정성을 구별해내는 비판적 공생자가 되어야 한다. 문자가 인간의 기억력을 감퇴시켰을지는 몰라도 인류에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고의 지평을 열어주었듯, 우리는 AI 슬롭이라는 쓰레기 산 위에서 역설적으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유의 고유성'과 '책임 있는 목소리'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기계의 문장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고뇌의 과정을 증명해내는 인간의 창작물은 더욱 고귀한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슬롭은 기술이 도달한 막다른 골목일 수 있지만, 그 골목 끝에서 우리는 비로소 기계는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처절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변곡점에서 기술 뒤에 숨겨진 인간의 얼굴을 끝까지 찾아내고 기계와 차별화된 비판적 안목을 기르는 자만이 다가올 시대의 새로운 주인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타무스 왕의 경고를 기억하되, 문자를 통해 새로운 문명을 일구었듯 AI라는 파르마콘을 현명하게 다루는 길을 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