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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 작가 May 08. 2021

스마트폰으로 만나는 세상,골목 -용동큰우물, 인천인현동

스마트폰으로 만나는 세상, 골목 - 용동 큰 우물, 인천 인현동



미세먼지와 꽃가루, 황사로 뿌연 하늘을 이고 집을 나섭니다. 태양이 나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해서 해는 없다고 보는 것이 맞는 듯합니다. 시간이 어중간한 이때(오후 2시)는 차라리 흐린 것이 사진을 찍는 데 더 좋을 수 있습니다. 확산광이 전체적으로 고른 빛을 만들어 질감이 부드러워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색상 또한 잘 살릴 수 있다는 이점도 있고요.



1호선 전철역 동인천역을 내려 공사 중인 왼쪽으로 역사 지하도를 따라 역 앞으로 갑니다. 공사구간이 끝난 시점에서 1974년부터 영업을 개시한 700여 개 점포의 대규모 지하상가 오거리가 보입니다. 동인천은 1980년대까지 인천의 중심지로 번화하던 곳입니다. 자유공원과 신포시장, 차이나타운, 신포동 패션거리 등 젊은이들이 상주하던 곳이었죠. 아직도 지하상가는 성업 중이지만 그 전의 영화는 물 건너 간지 오래입니다. 정면에 지하상가 대로를 마주하고 왼쪽 출구로 나서면 그곳이 바로 인현동입니다.


지하상가 오거리에서 왼쪽 6번 출구 '배다리, 용동 큰 우물' 방향으로 나오면 인현동 방향입니다. 혹시 응답하라 1988에서 정봉이와 만옥이의 데이트 장소 태극당이 생각나시나요? 인천에서도 서울 태극당과 같이 풋풋한 청춘들이 80년대 데이트 장소와 미팅 장소로 자주 활용하던 '크라운 빵집'이 바로 자리했던 곳입니다. 지하도를 나오자마자 만날 수 있었던 만인의 약속 장소 크라운 빵집은, 파리바게트와 뚜레쥬르의 공격적 마케팅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그 자리는 유명 부대찌개 집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1981년에 문을 열어 경양식으로 유명했었던 '잉글랜드 경양식'이 지금은 '잉글랜드 왕돈까스'라고 상호를 바꾸고 그 인테리어 그대로 추억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다행하게도 이 돈까스 집이 젊은 데이트족에게 핫플로 자리 잡았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잉글랜드 돈까스 또한 '응답하라 1988'에서 정팔이네 외식장소로 등장했던 곳입니다. 한 번 정도는 방문을 추천드리지만, 건물 자체가 오래되고 인테리어가 40년 전 그대로인 점을 감안해서 환상을 지우셔야 합니다.


용동은 구한말 용리였던 곳을 일제 강점기 때 용운정이라 했다가 해방 후에 용동이란 지명을 찾은 곳입니다. 용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는데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된 '용동 큰 우물'로 더욱 알려진 곳입니다. 용동의 다른 이름인 인현동은 해방 후에 붙여진 이름인데 '인천의 중앙에 있는 고개마을'이란 뜻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한 때 인천의 중심지가 지금의 동인천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내용입니다.



용동 큰 우물은 근처의 4,5개 동 수천 명이 물을 길으러 올 정도로 물맛도 좋고 물의 양도 풍부했다고 전해집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근처 축현초 뒤에 일본 양조장이 생겨 여기서 기른 물로 정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러다 보니 인현동은 가정집보다 용동 큰 우물을 중심으로 기생집과 요릿집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일본이 패망할 때 많은 집들이 망했지만, 6.25 이후 대한중공업 공사(현 INI스틸)라는 국영기업이 들어오면서 소위 '방석집'이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위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그 흔적들이 유흥업소로 숙박시설로 남아 있습니다. 골목 구석구석 젊은 사람들이 넘쳐나고 90년대 쇠퇴하기 전까지 번성하던 곳이었습니다.


박정희 군부정권을 거쳐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진 군부독재는 젊은 지식인과 노동자들의 울분을 자아냈습니다. 그때 모여서 술 마시며 시국을 논하고 토론하던 장소들이 바로 용동 큰 우물 골목 구석구석에 있는 부대찌개, 감자탕 집들입니다. 물론 학생들이나 지식인, 노동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경찰 정보과 직원, 안기부 직원들도 밤낮으로 상주해서, 누가 불온한(?) 말을 하거나, 소위 운동권 가요를 부르기 시작하면 그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곤 했던 곳입니다(미로 같은 골목 덕분에 많이 도망도 가곤 했지만 말입니다ㅎㅎ).


 

저 멀리 보이는 '용동집'이 그중에서 유명하던 곳인데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지금은 문을 닫았습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룸살롱과 방석집(은 중간에 숭의동의 '옐로하우스'라는 곳으로 거의 이전합니다), 그리고 식당들을 지나 골목을 구불구불 오릅니다. 개발이 많이 된지라 골목은 많이 없어졌지만 아직도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개항로와 레트로 붐을 타고 재오픈한 곳도 보입니다. 골목 끝 언덕에 오르니 오랜 시간을 견뎌왔을 작은 슈퍼가 보입니다.



언덕을 올라서서 기독병원 방향으로 갈까 하다가, 개항로 길과 겹쳐서 길을 건너기로 했습니다. 동인천에서 신포동으로 넘어가는 용동 큰 우물 언덕에서 길을 건너니 우리나라 개신교 최초 '한국의 어머니 교회'로 불리는 내리교회가 있습니다. 역사책에서 자주 듣던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에 만들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논의의 여지가 있고 1901년에 지어진 것은 확실합니다.  저는 이 교회에는 관심이 없고 내리교회 바로 아래에 있는 작은 선술집에 관심이 있습니다.


'누나집'이라는 곳으로 용동 큰 우물에 있던 부대찌개, 감자탕 집과 궤를 같이하던 선술집입니다. 삼치거리가 따로 있는 인천에서 유명한 삼치를 주로 하던 '삼치누나집'입니다만 통상 '누나집'으로 불렸습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아쉽게도 이곳 또한 문을 닫았습니다. 주인 분들 나이를 감안해봐도 그렇고 변화하는 세월을 생각해도 그러합니다.

 


100미터만 내려가면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신포국제시장과 개항로가 있습니다. 닭강정이라도 사볼까 하고 내려갔더니 포장 대기줄이 너무 깁니다. 여기는 코로나가 비껴가는 곳인가 봅니다. 고민하다가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는 누나 생각이 들어 부침개를 사러 갑니다. 부침개 4장을 사들고 4시간 동안 지친 다리를 버스에 싣습니다. 차를 가져와서 세워두고 걸을 걸 하는 후회도 들지만 잠시 생각뿐입니다. 차창 밖으로 뿌연 도시가 스쳐 지나갑니다. 썩어 넘어진 담장 너머로 보이던 또 다른 삶의 흔적들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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