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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 작가 May 06. 2021

스마트폰으로 보는 세상-
괭이부리 마을, 만석동

인천 만석동

괭이부리 마을, 만석부두와 북성포구, 굴막 - 인천 만석동



인천 동구 만석동은 서울로 운반하는 쌀을 모아두는 양곡 만석 저장 창고가 있어서 유래한 이름이라 합니다. 혹자는 여기에 고조선 시대부터 고인돌 등이 많이 있는데 영험한 고인돌을 숭배하는 토테미즘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도 합니다. 만석동은 바닷가에 인접한 동네로써 만석부두, 화수부두, 북성포구가 근처에 있습니다. 오래전에 소설가 김중미 씨의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 바로 만석동입니다. 


현 만석부두 입구 괭이부리말 


어른 키만 한 낮은 '하꼬방'(판잣집, 상자를 뜻하는 일본어 '하꼬'와 '방'이 합쳐진 단어)이 주욱 늘어서 있고,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 구석구석 쪽방촌이 이어져 있습니다. 1호선 전철 종점 인천역에서 걸어서 10분도 채 안 걸리는 만석동은 만석부두, 괭이부리말, 북성포구, 굴막으로 대변됩니다. 만석동은 조선시대 세곡을 쌓아두던 창고와 포구, 수문통이 있던 작은 어촌마을입니다. 1905년 일본이 갯벌을 메워 정미소와 간장공장을 세웠고, 이후 조선 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와 군수공장이 들어섰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북성동과 함께 조선인 노동자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6.25 전쟁 이후에는 피난민들의 거주지였습니다. 


만석부두와 수문통, 출처 공공누리

행정구역상 만석동을 절반 포함하고 있는 북성포구는 6.25 때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들었습니다. 화장실 등 여건이 조성되지 않아 용변이 북성포구 앞바다에 둥둥 떠다닌다고 똥마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만석부두는 인천 앞바다의 여러 섬들을 운항하는 여객선들의 출발지였습니다. 영종도로 가는 배도 만석부두에서 탔는데 1973년 5월 연안부두가 만들어지면서 항로가 폐쇄됐습니다. 지금 부두의 기능은 잃고, 낚시꾼들이 이용하거나 쭈꾸미를 잡으려는 선원들만이 이용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1940년대에 '괭이부리마을'이 만들어졌는데, 소설가 김중미는 괭이부리말 아이들에서 괭이부리말의 유래를 만석부두 앞에 있었던 '묘도'라는 섬에서 고양이가 많아 유래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만석동을 '큰 언덕, 큰 동네'를 가리키는 '아카사키'라고 불렀다는 것과 고양이 섬의 한자 표기가 '묘도'인데 여기서 '묘'가 삵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면 그 유래에 의문이 갑니다. 심지어는 괭이부리를 갈매기부리라고 오역해서 갈매기를 상징으로 붙여 놓은 카페도 있으니 웃긴 일입니다.



판잣집과 쪽방촌으로 상징되는 만석동은 또 다른 힘겨운 삶의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사전에도 나와있지 않은 '굴막'이 바로 그것입니다. 만석부두에서 배를 타고 나가 용유도, 무의도, 연평도와 백령도에서 직접 잡아 온 굴을 까는 굴막. 굴을 직접 따온 아낙들이 무거운 포대를 집까지 옮기느니 포구에서 까는 게 편하다 보니,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하꼬방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생긴 이름이 굴막입니다. 한 집에 두어 명씩 들어가서 밤새 굴을 까고 날이 새면 또다시 굴 배를 타고 섬으로 나갔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살아온 만석동의 할머니, 어머니들의 모습입니다.  



만석부두와 괭이부리말을 뒤로하고 길을 건너오니 한참 개발 중인 또 다른 만석동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아직 군데군데 남아 있기는 하지만 판잣집들은 거의 철거되고 그곳에는 빌라와 아파트가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인천 중구와 미추홀구에 비해 공공 프로젝트가 부족한 만석동에 들어 선 미술관과 카페 등도 보입니다. 인천에 사는 저조차도 몰랐던 새로운 공간들이라 자연스레 눈이 갑니다. 굴막 공동작업장 근처 문을 연 카페 '콩이네'에 들어서니 편안한 분위기와 함께 음료 가격도 1,500원에서 3,000원까지로 아주 저렴합니다.


만석동 우리미술관과 카페 콩이네 실내

새롭게 포장이 된 굴막 공동작업장 앞길을 따라 화도진 공원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지나다 보니 고등학교 시절 같이 밴드를 할 때 드럼을 쳤던 친구의 집이 생각납니다. 만석동에서 방앗간을 하던 집 아들이었는데  방앗간 다락방에 올라가서 같이 낄낄거리며 떠들던 그때가 생각납니다. 그 구불구불하던 골목들이 철거되고 뻥 뚫려 지금은 대로가 되었습니다. 추억은 그렇게 잊혀 가나 봅니다. 화도진 공원으로 넘어갈까 하다가 옛 동일방직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에 가장 유명(?)했던 노동쟁의로는 'YH 여공 신민당사 점거 농성사건'과 '동일방직 여공 똥물 투척 사건'이 있습니다. 박정희 유신독재의 몰락을 불러온 1979년 'YH 사건'은 여기서 논외로 하고, 그 사건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 1978년 '동일방직 사건'입니다. 박정희 정권과 안기부, 동일방직이 손을 잡고 어용노조를 만들어서 여성노동자가 대부분이었던 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해 했었던 악행입니다. 여성 노조원들에게 똥물을 뿌리고, 전원 해고시키면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서 재취업을 못하게 막았습니다. 또한 '도시산업선교회'라는 유령단체를 만들어서 모든 언론을 동원, '빨갱이' 프레임을 씌웠었던 사건이죠. 장시간 노동과 낮은 임금으로 악명을 떨치던 동일방직은 본사를 서울로 옮기고 공장시설은 베트남으로 모두 이전해 폐허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구 동일방직(현 동일그룹)의 현재 모습들

씁쓸함을 뒤로하고 동일방직 앞쪽 만석동을 더 돌아봅니다. 공장들이 즐비한 담벼락을 끼고 좁은 길로 들어섭니다. 낮은 집들과 좁은 골목 사이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내음이 물씬 풍깁니다. 우울했던 기분이 괜스레 좋아집니다. 저는 골목에서 보이는 것들이 폐허와 쓸쓸함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는 따뜻함이라 기분이 좋아집니다. 너무 좁은 길이라 사시는 분들한테 방해가 될까 봐 조심스레 촬영을 합니다.



만석동을 돌아 인천에서 냉면으로 유명한 골목인 '화평동 냉면골목'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좋아진 기분에 맞게 햇살도 너무 따스하고 바람도 살랑입니다. 행복한 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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