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by 채 수창


제가 연세가 좀 있으신 분들에게 사진 강의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무엇인지 혹시 아세요?

'아, 진짜 너무 어려워요' 이 말 말구요. 그럼 무슨 말이냐구요?


이 나이에 사진디자인과 미학, 인문학을 배워서 뭐하겠어?

방금 들어도 돌아서면 바로 잊어 버려요.

이런 건 젊은 사람들이나 필요하지, 저는 그냥 어울려 다니면서 좋아하는 걸 찍을래요.


제게 넋두리하듯 말씀을 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는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취미로, 즐기려고 한 사진인데 그냥 쉽게 쉽게 여행이나 다니면서 '찍으면' 되는거지, '굳이 머리 아프게 그렇게까지 해야 돼?그리고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전 이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들은, 우리들의 가능성을 우리 스스로 제한하는 환상일 뿐이라서 입니다.

'에이 무슨 가능성...? 취미든 직업이든 사진을 하는 사람들이 2천 5백만이나 된다는데...'

'그리고 예술은 아무나 하나? 난 관심 없어. 지금도 충분히 잘 찍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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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세계에서 나이는 단지 숫자일 뿐입니다.


'난 예술을 하자는 게 아닌데? 그저 내가 아름답고 예쁘다고 느끼는 것들이나, 내 손주들의 귀여운 모습, 주변에서 눈에 띠는 일상들을 담으려고 했던 것 뿐이지'라구요? 네, '예술을 하자는 게 아닌데'라는 말씀 충분히 공감합니다. 하지만 귀여운 손주들의 환한 미소와 일상의 아름다움을 남들과 다르게 더욱 깊이 포착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카메라의 기술적인 요소만을 완벽하게 알고, 포토샵으로 '사진을 찍으면' 되는 걸까요?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이런 모든 것들을 더 아름답고 나답게 담으려면, 사진을 이해하는 감각과 인문학적 시선이 필요합니다. 물론 지금까지 반백년 이상을 살아 오신 여러분들은, 이미 '나 답고', 삶에 대한 지혜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디자인은 어떤 것이 더 좋은지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 온 날들이 벌써 인문학적 토양을 만들어 주었구요.


단순히 취미가 아니라 '예술'이라고 하니까 대단해 보이지만,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듯 예술 또한 거창하지 않습니다. 또한 예술의 세계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 '내 사진을 남과 다르게 만드는' 창의성과 표현의 깊이를 결정 짓는 것은 여러분들이 살아온 삶의 경험과 시선이 좌우합니다.


사진은 단순한 기술, 메카니즘이 아닙니다. 사진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삶을 해석하는 언어입니다. 사진디자인은 구도를 통해서 그 순간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고, 사진 미학은 모든 것들이 '왜 아름다운가?'에 대한 이해를 높여서 사진적 시각을 풍부하게 합니다. 그리고 사진 인문학(그냥 인문학이 아니라 사진 인문학이어야 합니다)은 단순하게 셔터를 누르는 것을 넘어서, 그 사진 속에 담긴 삶의 이야기와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이 모든 것은 나이와 상관 없이 우리들의 사진을 통해 세상을 더 풍요롭게 바라보고, 그 소중한 순간들을 더욱 깊이 간직하게 할 것입니다.


50대와 60대, 70대의 여러분들에게는 20대, 30대의 청년들이 결코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삶의 깊이'입니다. 여러분들의 눈은 수십 년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상실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바로 여러분의 사진에, 젊은 작가들이 쉽게 얻을 수 없는 깊이와 진정성을 주는 보물입니다.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삶의 특정 시기에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배움은 우리가 세상을 인지하고, 이해하며, 내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 전체를 풍성하게 만드는 삶의 동력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나이가 들면 새로운 것을 배우기 어렵고, 창의적인 일이나 예술 '따위'는 젊은이들의 전유물이라는 세상의 통념에 너무 익숙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통념은 깨어지라고 있는 것이고, 역사는 이런 통념들어 얼마나 자주 깨지는지를 증명하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뉴욕과 시카고의 길모퉁이에 마치 스파이처럼 숨어, 사람과 도시 풍경을 찍었던 비비안 마이어를 생각해 보세요. 이름도 제대로 알리지 못한 보모로 평생을 살았던 그녀는, 뉴욕과 시카고 거리를 오가면서 삶을 끝내는 그날까지 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필름에 담았습니다. 그녀의 뛰어난 구도 감각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담긴 사진들은, 동시대의 어떤 유명한 사진가들의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비비안 마이어는 사진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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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를 돌아 다니며 야생의 아름다움과 아름다운 자연을 사진으로 담아낸 미국 사진가 아트 울프는 50대에 '자연과 야생 사진의 거장'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찾아 냈습니다(1951년 생으로 미국 시애틀에서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진은 풍경, 야생 동물, 그리고 토착 문화를 담은 컬러 사진으로, 전 세계 환경보호 단체들로부터 '놀라운 시각적 효과'로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아트 울프도 사진 전공이 아닌 미술 학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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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사진가 빌 브란트는 79세로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왜곡된 누드 사진, 유명 예술가의 초상화, 풍경 사진 등을 촬영하며 20세기 영국의 가장 중요한 사진작가 중 한명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빌 브란트 또한 사진 전공이 아니라, 페렴으로 요양하러 갔던 스위스에서 어느 영업 사진관 조수로 들어가면서 사진과의 인연을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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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뉴욕에서 태어나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를 베이스로 활동하는 사진가 로저 발렌은, 무의식을 건드리고 인간의 내면을 환기시키는 '실존주의적' 사진가로 유명합니다. 그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통해, 인간의 깊은 심리를 표현하는 작품 활동을 합니다. 어릴 때 사진 갤러리를 운영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심리학과 광물경제학 박사를 취득하고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로 가면서 사진을 하기 시작했고, 50세가 넘어서야 본격적으로 예술 사진가의 커리어를 시작합니다. 사진 전공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25권 이상의 책을 출판했으며, 그의 사진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들 일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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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는 아니지만, 쿠바 태생의 추상화가 카르멘 에레라는 89세에 첫 그림을 팔기 시작해서 104세까지 작품활동을 했습니다. 101살이 되던 해에 뉴욕시 예술가 스타상에 이름을 올렸고, 2016년 첫 회고전이 열립니다. 그녀는 단순하게 늦게 시작하는 것을 넘어, 오랜 시간 묵묵히 인내와 끈기로 자신의 길을 찾고 추구하다가, 빛을 보게 되는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에레라 또한 사진 전공자가 아닌 건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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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대한민국을 벗어나지 않아도 됩니다. 한국에서도 60대에 사진을 시작해서, 70대, 80대에 개인전을 여는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작가들의 작품에는 젊은 작가들의 기교나 기술적 완벽함이 부족할지 모르지만, 삶의 지혜와 깊이는 남다르게 담겨 있습니다.


'아니 금방 잊어버린다니까요'

괜찮습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진정한 학습의 과정입니다. 모든 예술가는(굳이 예술가에 한정하지 않아도) 배우고, 잊고, 다시 배우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그 반복되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자신만의 시선입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기억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 배우는 과정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고, 사진을 통해 내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이 나이에 배워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구요?'

소용은 결과를 통해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과정 자체에서 오는 기쁨과 삶의 풍요로움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 장의 사진에 담아내는 이야기와 프레임 구석구석 배치하는 요소들, 빛과 그림자를 통해 표현하는 삶의 감정들은 그 어떤 젊은 작가도 흉내낼 수 없는 여러분만의 고유한 서사가 됩니다.


여러분 손에 들린 카메라는 세상을 향한 창이면서, 내 속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마법의 도구입니다. 그리고 지금 배우는 사진 미학과 사진인문학, 사진 디자인은 그 이야기를 가장 아름답고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는 보조 도구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배우시고, 즐겁게 찍으세요. 여러분들의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는 모든 것들은, 분명히 깊은 울림과 감동을 선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들이야말로 '이 나이'에 사진을 공부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가장 아름답고 진정한 의미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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