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의 '무인도'를 읽으며
[Advanced Photo Class] 수업 시간에 문득, '시나 음악, 영화 같은 걸 사진으로 표현하면 어떨까요?'라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주 오래 전 스튜디오를 처음 할 때 생각이 나더군요. 상업 사진을 배우겠다고 온 직원들한테, 잡지를 보면서 조명을 가르치고, 음악을 들으면서 사진을 촬영하라고 시켰었던 그 오래 전이 말이죠.
그 때 그 직원들은 얼마나 귀찮고 힘들었을까요? 그래도 나름 사진학과 출신이거나, 아니면 사진으로 밥을 먹고 살던 친구들이었는데 말이죠. 왠 이상한 사장이란 사람이, 사진 가르친다면서 이상한 거나 시키고, 데리고 다니고. 참 힘들었을 거 같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사진은 독립된 매체이면서 동시에 시나 음악, 영화와 구조적인 원리를 공유합니다. 이런 타 매체의 문법을 사진적 언어로 번역(?)하는 훈련은, 기술 습득이 아닌 '시각적 사고의 확장'을 목표로 합니다. 시에서는 압축과 여백, 비약, 이미지의 병치등을 배우고, 음악에서는 템포나 강약, 주제와 변주, 대위법을 배우죠. 영화에서는 더 많은 것들을 배웁니다. 프레이밍, 시퀀스, 미장센, 시점, 편집, 시간성 등 말입니다. 이런 방법들은 '무엇이 좋다'는 감상을 넘어서, '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데 핵심이 있습니다. 타 매체는 사진의 거울이 된다는 말이죠.
오늘 밤에 생각나는 시가 있습니다. 이영광의 무인도.
무인도 - 이영광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것 같을 때면 어디 섬으로 가고 싶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결별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떻게 죄짓고 어떻게 벌받아야 하는지
힘없이 알 것 같을 때는 어디든 무인도로 가고 싶다
가서, 무인도의 밤 무인도의 감옥을, 그 망망대해를 수혈받고 싶다
어떻게 망가지고 어떻게 견디고 안녕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그만 살아야 하는지
캄캄히 다 알아버린 것 같은 밤이면 반드시, 그 절해도에 가고 싶다
가서, 모든 기정사실들을 포기하고 한 백 년 징역 살고 싶다
돌이 되는 시간으로 절반을 살고
시간이 되는 돌로 절반을 살면, 다시는 여기 오지 말거라
머릿속 메모리 칩을 그 천국에 압수당하고 만기 출소해서
이 신기한 지옥으로, 처음 보는 곳으로 두리번두리번 또 건너오고 싶다
「끝없는 사람」, 문학과 지성사
그냥 만들어 봅니다.
시가 말하는 '기정사실 포기', '한 백 년 징역', '돌이 되는 시간', '시간이 되는 돌'을 사진적 은유로 번역하면 '존재가 점점 풍경 속으로 스며들며 비물질화되는 서사'가 됩니다.
1. 어디든 무인도로 가고 싶다 : 시 속의 무인도는 실제 섬이 아니라, 관계와 규범에서 떨어진 '정신적 공간'입니다. '도망'이라기 보다는, 존재가 고요 속으로 미끄러지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완전히 비어 있는 공간은, 존재의 초기화 상태를 상징합니다.
2. 모든 기정 사실을 포기하고 한 백 년 징역 살고 싶다 : '백 년 징역'은 고립의 처벌이 아니라 자발적 고요입니다. 틈새로 들어 오는 빛은 외부 세계와의 최소 연결을 상징하죠. 타협 없는 미니멀한 공간에서의 '징역'은 자유의 다른 이름입니다.
3. 돌이 되는 시간으로 절반을 살고 : 인간이 돌에 흡수되는 듯한 느낌입니다. 인간의 경계가 흐려지며 '시간에서 물질로', '물질에서 시간으로', 시의 '시간이 되는 돌로 절반을 살면'의 물질이 시간으로 변환됩니다.
4. 다시는 여기 오지 말거라 :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시의 문장을 '관계 단절의 비가역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되돌릴 수 없는 이별입니다.
5. 기억의 칩을 그 천국에 압수당하고 : '기억 압수'는 폭력적 삭제가 아니라, 원치 않았던 기억에서 해방되는 초월입니다.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제거되는 장면입니다.
6. 처음 보는 곳으로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또 건너 오고 싶다 : 시의 마지막 구절을 존재의 환생, 다시 태어남으로 표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