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공원에서

번개출사 중에

by 채 수창

용산공원을 걷는다. 미군이 떠난 자리, 아스팔트 위에 남아 있는 영어가 눈에 들어온다. “MAKE YOUR OWN WAY.” 누군가에겐 단순한 교통 표지였을 이 문장이 오늘은 유난히 다르게 읽힌다. 스스로 길을 만들라는 뜻, 수십 년 만에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온 이 땅에서, 그 문장은 더이상 명령이 아니라 질문처럼 다가온다. 우리는 정말 우리 길을 만들 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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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하늘 아래선 색이 의미를 잃어간다. 선과 면, 밝고 어두운 관계만이 남는다. 철조망이 만들어내는 다이아몬드 패턴도 이젠 더는 경계나 금지를 뜻하지 않는다. 그냥 반복되는 형태, 직물처럼 얽힌 표면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 아래 곡선 하나가 프레임을 가로지른다. 하나둘 의미가 걷혀나간 자리에 조형의 감각이 스며든다. 어쩌면 이것이 추상을 향한 첫발일지도 모른다.


익숙한 일상을 조형적으로 바라본다는 건, 사물에서 의미의 껍질을 벗긴다는 뜻이다. 용산공원의 도로표시, 철조망, 시설물들은 원래 저마다의 쓰임새가 있다. 하지만 프레임 속에 들어오면, 기능은 사라지고 이름 없는 형태가 된다. 수평선과 사선 사이의 긴장, 검은 면과 흰 면의 균형, 날카로운 모서리와 부드러운 곡선이 맞부딪히는 대화 등 이 관계들에서 세상은 예상치 못한 질서를 보여준다.


그래서 흐린 날이 좋다. 그림자가 사라지면 입체가 납작해지고, 색이 사라지면 오직 명암과 톤만 남는다. 세상이 단순해지는 게 아니라, 평소 보지 못하던 또다른 복잡함이 드러난다. 형태와 형태 사이, 보이지 않는 선들이 어느새 눈앞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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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장면 속, 더는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확신이 없다. 세로줄이 그어진 검은 곡면, 거대한 어둠, 그 한복판에 또렷이 떠 있는 작은 빛 하나, 이게 벽인지 하늘인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제 카메라는 대상을 남기는 도구가 아니고, 순수한 시각적 경험을 만들어내는 장치가 된다. 사진이 ‘무엇’을 담았는지를 묻는 대신, ‘이 면과 선과 빛의 배치가 나에게 어떤 감정과 생각을 주는지’를 스스로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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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군사 기지였던 길을 걸으며 문득 생각한다. 이곳의 역사를 남기는 길은 여러 가지다. 남아 있는 건물을 사진으로 남길 수도 있고, 변화의 과정을 장면마다 기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방식을 택했다. 의미를 빠르게 좇지 않고 잠시 멈춰, 눈앞의 형태들 스스로가 말을 걸게 두는 것이다. 길 위 문자가 더이상 글자가 아니고, 흰 도형이 되어버리는 순간. 철조망이 경계가 아닌 패턴으로 느껴지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익숙한 세계를 뒤집어 새롭게 만난다.


스스로 길을 만든다는 것, 어쩌면 이런 게 아닐까? 이미 주어진 익숙한 것들 사이, 눈에 띄지 않던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는 일, 흐린 날, 되돌아온 땅 위에서 나는 조용히 그 연습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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