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수 있는 곳과 가고 싶은 곳
지난 2020년부터 ‘장애인 친화 미용실’이 장애인의 일상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성남시, 그리고 서울시 등에서 시와 민간이 협력해 개소, 현재 운영 중이거나 아직 준비 중인 곳들도 있다.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말하면 마음이 복잡했다.
장애인 친화 미용실. 누군가는 “드디어”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이제라도”라고 말했다. 그 말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동안 미용실은 장애인에게 너무나 불친절한 공간이었다. 문턱 하나, 의자 하나, 말 한마디가 머리를 자르는 일보다 더 큰 장벽이 되곤 했다. 그 현실을 인정하고 시와 민관이 움직였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 명(明)이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지워지지 않는 질문이 남았다.
“이건 정말 우리가 가고 싶은 방향일까?”
장애인 친화 미용실은 “장애인도 머리를 자를 수 있는 곳”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동시에 “장애인은 여기로 가면 된다”는 메시지도 함께 만들어냈다. 이 둘은 아주 닮아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전자는 확장을, 후자는 퇴보라고 생각했다. 배려는 같은 공간을 더 많은 사람이 쓸 수 있게 만드는 일이어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배려는 “따로 준비된 공간”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때부터 배려는 천천히 분리가 된다.
“어차피 장애인은 장애인 미용실 가면 되니까.”
이 말은 아직 공식적으로 선언된 적은 없다. 하지만 정책은 늘 말을 하지 않아도 사회적 언어를 바꾼다. 일반 미용실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굳이 우리까지 바꿀 필요는 없겠네.”
관련 행정자는 “대안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장애인은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한 방향으로 이동하게 된다. 선택지는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줄어든다. 갈 수 있는 곳은 생겼지만 가도 되는 곳은 정해진다.
장애인 친화 미용실은 대체로 친절하다. 도와주고, 기다려주고, 배려해준다. 하지만 그 친절 속에서 나는 종종 고객이 아니라 ‘대상’이 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회통합은 장애인을 위한 공간을 얼마나 잘 만들었는지로 평가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같은 공간을 같은 이유로, 같은 방식으로 선택할 수 있는가?”
장애인 친화 미용실이 과도기적 장치라면 의미가 있다. 일상을 바꾸기 위한 임시방편이라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도착지가 되는 순간, 우리는 다른 방향으로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명(明)과 암(暗) 사이에서, 명은 분명하다. 그동안 외면했던 일상을 민관이 함께 손잡아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성과를 보여줄 시기라는 점. 그러나 우려되는 점도 분명하다. 분리된 배려는 사회통합의 언어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 나는 장애인 친화 미용실이 없어지길 바라는 게 아니다. 다만 이런 질문은 계속 남아야 한다.
“왜 아직도 ‘장애인 친화’라는 말이 따로 필요할까?”
나는 갈 수 있는 곳 보다 가고 싶은 곳을 원한다.
나의 일상은 거기에서 시작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