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린 말 하나 없는데 화가 나는 이유, 경조사 참여가 불편한 장애인
“넌 왜 결정적인 순간마다 장애를 이용하냐”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경조사가 발목을 잡는다. 그것은 돈이 아니라 나를 배제하는 환경과 시선이다. 동료로서, 친구로서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는 것 또한 나의 일상이다. 그 일상이 작동되지 않을 때 우리는 권리를 강조한다.
결혼식장 하객들과 사진을 찍고 싶지만 경사로가 없을 때, 장례식장 들어왔는데 신발 벗고 들어가야 할 때. 나는 이 두 상황 속에서 슬퍼하는, 때로는 기뻐하는 친구와 동료들에게 나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가. 하객들 사이에서 의자를 빼 달라고 하면서 내 휠체어 바퀴와 뒷자리 의자 간격의 적정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앞만 보고 가는 사람들이 내 바퀴에 걸려 음식이 담긴 접시를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에서 클러치는 필수다. 전동휠체어를 보이지 않는 곳에 반듯이 주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는 내 휠체어를 움직인다고 힘껏 밀며 ‘왜 안 움직이지’ 하면서 나를 찾기 때문이다.
당당함은 필수다. 장례식장에서 신발 벗고 기어가더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 더 힘들다. 또한 클러치를 짚고 서 있을 때 떨리는 다리를 아무렇지 않게 힘주며 있는 것 또한 중요하다. 경조사에서 터득한 일종의 ‘노하우’다. 이것이 서툴면 주변 사람들이 나를 주목한다. 그것이 싫기 때문에 포커페이스가 필요하다. 경조사의 주인공은 나와 같은 하객이 아니기 때문에 주목받고 싶지 않다. 장애가 있어 주목받는 것은 어떤 과정이 있었든 간에 불편함과 동정 어린 시선으로 귀결된다. 다행히도 30대 중반을 넘어서 이것들을 자연스럽게 해내고 있다.
대안은 무엇인가, 내가 더 당당하게, 그러니까 CRPD가 말하는 사회통합(social Inclusion)을 위한 나의 실천 방법이란 무엇이냐는 말이다. 내가 외면할 수도, 포기할 수도 있는 보통의 삶을 도전하는 것만이 사회통합이 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먼저 섞이기 위한 노력이 어떠한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일까, ‘다음부터는 장애인 하객을 위해 결혼식장에 경사로를 설치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사회통합의 시작이 될 수 있을까. 나의 권리옹호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과 불편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나는 권리옹호라 정의하고 싶지 않다.
결혼하는 친구에게, 동료에게 “거기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을까요” 또는 “경사로가 있을까요”라며 확인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되어 있지 않아 내가 “참여하기 어렵겠어요”라고 한다면 상대방에게 “넌 왜 결정적인 순간에 장애를 이용하냐”라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다. 틀린 말이 아닌데도 화가 나는 이유는 나의 불편함을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편한 상황들이 모여 세상이 바뀔 수만 있다면 나의 희생은 가치 로운 것일까, 그렇게 해석하기에 그 과정에서의 내가 비참할 때도, 부끄러워 견디기 힘든 경험들만 쌓인다. 그렇기 때문에 “넌 왜 결정적인 순간에 장애를 이용하냐”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데도 화가 난다. 난 밝게 살아가는 장애인과 거리가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