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우리 정말 가도 될까
품격(品格)
품격(品格)이라는 단어를 이루는 한자어는 물건 품(品)과 격식 격(格)이고, 사전적으로도 "주변 형편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를 갖춘 모양새를 뜻한다. 명품백이나 자동차, 값비싼 정장 같은 상품의 가치를 표현하는 말로도 자주 사용되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품격은 어떤 자리에 어울리는 고급스러운 '형식'적 가치를 의미하는 말로 통용된다.
의전(격식)이 중시되는 사회
2002년, 처음으로 친구와 함께 간 장례식장, 슬픔을 나눠야 할 곳이며, 그 슬픔을 함께 애도하고, 힘을 주고자 함께한 곳, 천안역에서 신도림역까지 열심히 갔다.
평상시에도 온몸을 베베꼬아가며 경직되어 말하던 친구였지만 그날 따라 유난히 힘이 바짝 들었다.
"우리 가도 되는 걸까?"
친구의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첫 번째 의미는 장애인을 받아 줄까?
두 번째 의미는 처음 가는 곳이라 걱정된다.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 형, 우리 많이 좋아했잖아 갈사람 안갈 사람 정해졌냐!"
나는 굳이 말 안해도 알 것을 화내면서 다시 한번 강조하듯이 친구에게 언급했다.
빼곡히 모인 사람들, 들어갈 '틈'이 없었다.
병원에 도착하여 가족들과 인사를 나눈 뒤 준비한 봉투를 건네고, 영정사진을 가만히 보았다.
친구는 말 없이 울었고, 나는 기도를 했다.
잠시 후 우리는 휠체어를 주차한 후 자리를 잡고 음식을 기다렸다.
음식이 나오자 친구는 휴대용 빨대를 꺼네며 소주 한병을 컵에 부었다.
평소 물도 빨대로 먹는 그 친구에게 나는 별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친구를 주시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뒤 늦게 주변 분위기를 알아챈 친구는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밥을 먹고, 다시 신도림역으로 향했던 우리 둘은
알 수 없는 마음의 불편함을 갖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괜히 갔나봐"
-"그니까 거기서 술을 왜 쳐먹어 왜!"
존엄/존중과 무관한 의전만을 강조하는 품격주의자들
의전(격식)이 중시되는 사회는 장애인에게는 대체로 최악의 삶의 조건이다. 엄격하게 정해진 제스쳐는 비표준적 신체들, 혹은 그 의례양식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스트레스만 준다. 앉고 일어서는 방법과 순서, 말과 움직임의 속도가 품격을 구성할 때, 몸과 말의 속도, 예측불가능성, 불균형, 불규칙을 동반하는 (물론 우리 몸은 나름의 규칙과 질서가 있지만) 우리 신체는 고전주의 시대 귀족들의 연회에 등장했던 장애인들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친다.(노트담의 꼽추 처럼...)
이토록 의전이 중시되는 국가에서 장애인은 공식적인 상징적 위치에서 일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비공식적인 일상에서도 기피대상이다. 우리는 때로 음식을 먹다 포크를 날리고, 와인이나 소주, 맥주에도 빨대를 꽂아 마시며, 전동휠체어로 주변을 들이받아 엄숙한 분위기에 흠집을 내도 “그러려니” 하는 공간이 좋다.
인류학자 뒤르캠과 고프만은, 현대의 우리들은, 일상에서 일정한 상호작용 의례를 준수하여, 지위의 다양한 차이들을 넘어 존재하는 ‘인격’에 존중을 표하며, 이를 통해 인격의 보편적 존엄성을 구성한다.
익명의 공간에서 청소노동자든 경기도지사이든 버스탑승 줄을 서고 서로 존칭으로 대한다(대해야한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일은 권위만을 강조하는 과잉된 ‘의전’의 발전이 아니라(그만하면 됐다) 보편적 존엄을 만들어내는 수행의 형식을 발명, 발전, 확산시키는데 있다.
엘리베이터 독점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복지관을 방문하자 복지관의 엘리베이터는 그의 전용이 되었고, 노인과 장애인들은 계단으로 걸어내려와야 했던 유명한 사례는, 존엄/존중과 무관한 의전만을 강조하는 품격주의자들의 사회를 보여주는 또 다른 거울이다.
'품격있는 나라’를 강연했던 나경원 의원은 얼마 후 한 장애인시설을 찾아가 이용자인 장애인을 알몸상태로 목욕시키는 장면을 언론에 노출했다.
장애인을 이해하고 싶다면 장애인 시설에 목욕봉사를 가서 해결될 일이 아니지만, 정 그러고 싶다면 당사자의 동의를 철저히 구하고, 주변에 카메라나 사람들의 시선을 배제하고, 동성을 원칙으로, 그의 나이나 의사소통능력, 지적장애가 있는지와 무관하게 그를 존중하는 표현으로 대해야 한다.
존엄성을 목표로 한 ‘의례’ 준수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
2017년 의전에 중독된 품격주의자들이 이제 그만 자취를 감추기를 희망한다. 최고 권력자가 음식을 흘리고 포크를 떨어뜨리는 장애인 앞에서 빨대로 와인을 함께 마시는 인간이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인가?
이름 최충일.
집에서는 "아빠, 남편, 아들"이고
직장에서는 "선생님",
무대위에선 "엄지왕자",
친구들은 "쪼까니"(키가 작아서)라 부른다.
그리고 지체2급 장애인이다.
사람들은 살면서 다양한
호칭과 별명을 갖는다.
그러나 "장애인"은 내게
호칭도 별명도 될수 없는 단어다.
어릴때 동네 꼬마들이 놀릴때 빼고는...
평소 사람들이 "장애인 안녕?"
이라고 한적은 없었다.
"장애인"이란 단어는 나의 삶가운데
지극히 한정된 상황에서만 불려지는
어색한 "middle name"이다.
중고등학교를 특수학교에서 졸업,
대학생활 힙합에 빠졌고 지금도 사랑한다.
직장이 있고 결혼하여 아빠가 되었다.
삶의 행복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싶다.
장애인이 아닌 아빠, 남편, 래퍼, 직장인, 아들로써...
삶의 다양성과 일상을 타이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