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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창민 Jun 17. 2024

친구

죽마고우와 지기지우 사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소싯적 친구들은..


초등학교, 중학교 소싯적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잊혔다. 잊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같은 동네 살면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동네 친구는 명절 때 개울가에서 종종 본다. 같은 학년 동네 친구는 여덟 명이었다. 우리는 둘째, 셋째가 많아서 대부분 남자였다. 여자는 한 명뿐이었다.


코흘리개 어렸던 아이는 이제 40대 아버지가 됐다. 명절 때면 아이를 데리고 개울가에 나와 놀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중학교 친구는 더 많이 잊혔다. 그래도 생각나는 친구가 있고, 지금도 종종 연락하는 친구는 있다.


주로 친구라고 말하는 친구는 고등학교 친구들이다. 나는 두메산골 출신이라, 고등학교는 시내로 갔다. 기숙사에서 3년 내내 먹고살고 공부했다. 수능이라는 힘든 고비가 있었지만 동고동락한 친구들을 좋아했다. 고교 기숙사 생활은 좋은 추억이다. 이때 친구가 친한 친구가 됐다.


학교에서 동급생 중 서울로 대학을 진학한 친구는 스물다섯 명 정도 됐던 거 같다. 그때만 해도 지방의 작은 농촌 도시였지만, 우리는 학원에 다니지 않고 스스로 공부해서 서울로 대학에 갈 수 있었다. 지금은 더 어려워졌다고 한다. 그만큼 서울과 지방 간 교육격차가 심해졌다는 방증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최근 서울대 신입생 중에서 수도권 출신 비율이 3분의 2 정도 된다고 한다. 매년 그 추세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지방 출신이 서울로 오기 더 어려워지고 있다. 서울에는 자원도 많고 사교육도 발달해 있어서 이 격차가 줄어들기는 쉽지 않을 거 같다. 모두 서울대를 들어간 건 아니지만, 나와 친구들은 그런 면에서 나름 운이 좋았다.


동해 바다, 어릴 적 친구들과 무궁화 기차를 타고 갔었다.


스무 살 때 친구, 먼 타지에서의 위안


고교 시절에는 같이 먹고 자고 공부했고, 대학에서는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자주 만났다. 지방 출신의 촌놈들이 대도시에서 서로 의지하고 만나고 술 마시고 놀았다. 타지 생활에서 큰 힘이 됐고, 서로 같은 지역,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유대감을 이어갔다. 한때는 친구가 참 좋았고 자랑스러웠다. 많은 것을 줘도 손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동료의식이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지 2~3개월이 지났을 무렵, 나는 수업이 끝나고 단과대 건물 옆 한적한 공원 벤치에 앉았다. 그늘 아래였다. 대학 정문을 처음 지날 때 ‘내가 서울로 왔구나’ 안도감을 가진 지도 몇 개월. 겉으로는 씩씩했지만 속은 힘들었다. 공허했다. 쓸쓸했다. 고향을 떠나온 향수병이었을 수도 있고, 대도시 서울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약간의 우울함도 있었던 거 같다. 벤치에 앉아 혼자 울었다. 그럴 때마다, 저녁에는 친구를 만났다. 친구들은 웃고 떠들고 농담하고 어깨를 토닥여주며 나를 위로했다. 나도 그들을 위로했다.   


친구들은 각자 군대를 갔다 오고 졸업하고 직업이 달라지면서, 생각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 성향 그대로인 사람도 있고, 더 성숙해진 사람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멀어진 사람도 있고, 예전의 친함과는 다른 차원에서 서로를 더 존중하고 성숙하게 대화하는 사이도 생겼다.


10대 소싯적 친구들은 같은 학교, 같은 지역에서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친해진 관계다. 그렇기 때문에 더 스스럼없고 언제부터 진짜 친해졌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게 오래된 죽마고우의 조건이다. 언제부터 우리 친해졌지, 대답하기 힘들다.


어렸을 때에는 서로 놀리고 험한 말도 하는 게 자연스럽다. 오히려 서로 막 대하는 게, 친함의 다른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짓궂은 장난을 치고 자기주장을 강하게 한다. 어떨 땐 위로를 받기 위해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감정선이 널뛴다. 참 다양하다. 친구니까 그러려니 한다. 친구니까 그럴 수도 있다. 남자다 보니 과도한 남성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친했지만 은근 서로 견주어보는 비교 의식도 생겼다. 누구는 돈을 많이 벌었다더라, 누구는 잘 나간다, 누구는 어떻게 됐다더라. 비교하면 우월감도 생기지만 자괴감도 생긴다.

삶을 살아가고 가치관이 정립되면서, 어릴 적 친구이지만 예전의 습관을 그대로 노출하는 경우에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됐다. 어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연스러운 성숙의 과정이다.


친구들은 일상적인 얘기를 많이 한다. 돈, 집, 직업, 투자, 주식, 결혼, 아이, 운동, 취미. 관심사를 말하는 것이 이상하진 않다. 다만, 나는 관심사가 조금은 달랐다. 이야기 주제에서 나는 정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에 관심을 두었다. 관심사가 달라지면서, 친구들과 조금씩 삶의 방향성도 달라졌다.




친구, 죽마고우와 지기지우 사이


이제는 사회적으로 맺어진 관계, 대학 때 선후배, 같이 일한 선후배와 동료, 뜻을 함께 하는 사람,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과 더 친숙해지고 있다. 이들과 더 많이 소통하고 있다. 예전부터 만난 관계는 아니지만, 여러 사회적 동료로서 관계를 맺고 이야기하고 공감하는 것이 의미가 더 깊어졌다.


사회적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직업적인 유대관계를 맺으며, 삶의 방향성이 비슷한 주변의 동료들이 친구가 됐다. 비슷한 지향성을 가진 사람이 나이, 지역, 성별을 떠나 친구가 됐다. 연고 중심의 친구가 아니라, 삶의 방향성이 비슷한 친구가 진짜 친구가 됐다.


소싯적 친구 중에서도 친구라는 개념이 재정립되면서, 다른 의미에서 다시 더 좋은 친구가 된 경우도 생겼다. 친구의 범위가 넓어졌고, 친구가 발전했다. 사회에서 만난 친구가 새로운 친구가 됐고, 몇몇 예전 친구도 또 다른 새 친구로 변모했다. 죽마고우보다는 지기지우다. 죽마고우도 새로운 지기지우가 될 수 있다.


사회적, 직업적 관계와 가치관의 공유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 서로 삶의 지향성을 인정하고 토론하며 존중하는 동료이자 친구. 삶을 동행하는 친구. 가치관을 공유하는 친구. 그런 친구가 서로 친구가 된다. 새로운 친구를 많이 그리고 다시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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