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둘째 날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지한이는 내가 이것저것 담아버려 빽빽하게 가득 찬 시간표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뿐이랴, 형제 같던 사촌 동생이 떠난 아파트 단지의 정글 같은 또래들 속에서 신이 났다가 속이 상했다가를 반복하는 롤러코스터 같은 하루하루를 무사히 살아냈다.
방학한 주의 일요일, 더 기다릴 것도 없이 제주도로 떠났다. 요 근래 바빠서 평일에는 어둠 속에 손짓으로 인사만 겨우 했던 남편과 함께, 오랜만에 우리 세 가족만 오붓하게 떠나는 여행이다. 비싸기로 유명한 7말 8초의 제주도라, 우리는 캐스퍼를 빌렸고 다니는 내내 경차라 너무 좋다(주차할 때), 근데 좀 멀미가 난다(제주 도로 곳곳의 방지턱을 넘을 때)를 반복하며 다녔다.
김포공항에서 지한이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들을 외치며, 순서대로 수하물을 부치고(첫 번째 패이보릿 파트),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고, 탑승을 위해 연결통로를 걸어 들어가, 비행기 이륙까지를 무사히 보고, 착륙하여 마지막 패이보릿 파트인 짐 찾기까지를 끝냈다.
제주도에 도착하고 갈치구이를 먹으러 갔다. 급하게 검색해서 여기 정도면 괜찮겠다 싶어 들어간 가게였고, 음식은 평범했다. 약간 늦은 점심을 먹기에 좋았는데, 다만 관광객들에게 입소문을 탄 곳인지 중국 관광객 일행이 자리 잡고 앉아 조금 시끄러웠다.
이마트에서 커다란 튜브와 모래놀이에 필요한 모종삽을 산 후에, 첫 번째 숙소인 신화월드로 향했다. 신화월드 메리어트관의 객실은 넓고 깨끗했다. 짐을 푼 뒤 신화월드 메리어트관의 수영장인 모실로 향했다. 더운 한낮의 열기가 남아있어서인지 오후 느지막이 수영복을 입고 야외로 나와도 크게 춥지 않았다. 새로 산 수영복은 뱃살을 가려주는 짧은 바지 형태였으나, 기대와는 달리 뱃살을 가려주지 못했다. 두 시간 정도 수영장에서 놀다 방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호텔 내 카페에서 피자를 먹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피자는 냉동 제품을 데워준 느낌이었지만.. 초등학생의 입맛에는 다행히 잘 맞았다)
다음 날, 이 날이 이번 제주도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아니었을까. 야심 차게 시작한 아침은 보말죽과 보말 칼국수였다. 매생이를 넣은 보말 칼국수와 죽은 맛있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난 후 우리는 판포포구로 향했다. 스노클링 장비를 야심 차게 들고는, 지한이는 전전날 어린이용 오리발도 구입했다. 판포 포구는.. 오전에 만조였는지 물이 꽤 깊었다. 입구 쪽도 발이 안 닿였던 걸로 보아 2m 이상되는 듯했고, 포구의 출구 쪽은 4m는 족히 넘을 것 같았다.
강렬히 내리쬐는 태양아래, 그늘 하나 없는 포구의 물빛은 환상적이었지만, 초등학교 1학년이 놀기에는 다소 거친 물살과 깊은 수심으로 이내 체력을 소진한 채, 큰맘 먹고 빌린 평상에 들어가 아이스크림과 아이스커피를 먹으며 나머지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끝낼 순 없어, 나 한 번 더 물고기 보고 올게,라고 씩씩하게 일어나 바다에 입수한 나는, 요즘 제주 바다에서 유명한 푸른우산관해파리 떼를 만나 들어가자마자 나왔다. 내가 나오자마자 판포 포구를 관리하는 청년회에서 해파리 떼가 몰려오고 있으니 방파제 쪽으로 붙어서 놀라는 방송을 했고, 나와 지한이와 남편은 경계선 안쪽으로 선을 그리면 몰려들어오는 푸른우산관해파리떼라는 진풍경을 목격했다. (재밌었다)
한낮의 판포 포구를 뒤로한 채, 우리는 협재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제주도는 바다놀이 아닌가, 점심은 파라솔을 잡은 뒤 간단하게 컵라면과 김밥을 먹자 했다. 협재는 10여 년 전 결혼 후 첫 제주도 여행 때 남편과 왔었는데, 그땐 영 시시했던 기억이 있어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협재 해수욕장 근처의 주차장은 만차였으나, 캐스퍼는 남들은 지나칠만한 빈 공간을 캐치했고 기막힌 주차를 했다.
파라솔은 해변에 줄지어 세워져 있었고, 우리는 그중 바다에 가까운 파라솔에 자리를 잡았다. 오기 전 검색된 내용대로 이번 여름 제주도 해수욕장의 파라솔, 평상 시설은 가격이 합리적이고 관리도 잘 되고 있었다. 수영복을 입고 온 터라 그대로 바다로 들어갔다. 이게 무슨 일인가. 국내에서도 깊지 않은 적당한 수심에,
마치 워터파크의 인공 파도풀을 연상케 하는 재밌는 바다놀이가 가능할 줄이야. 바람이 알맞게 불어준 덕인지, 그날의 파도는 나와 남편이 놀기에도 완벽했고, 물론 초등학교 1학년 남자아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었다. 지한이는 파도로 몸을 던지는 놀이를 쉬지 않고 몇 시간을 하고는, 다음날 거짓말처럼 바다는 이제 그만 가고 싶다고 얘기했다. 우리의 체력은 이 날 협재에서 근 80%를 소모하지 않았나 싶다. 무릎이 욱신거린 걸로 보아, 나도 바닷가에서 며칠을 내리 놀던 그 시절 몸뚱이는 아니었다.
점심은 파라솔 밑에서 간단한 컵라면과 김밥을, 저녁은 해수욕장 바로 근처의 삼겹살 집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저녁 먹기 전 해수욕장 샤워장에서 샤워를 했는데, 널찍한 사물함에 콸콸 나오는 온수 샤워기를 이용하자니 문득 씻는 게 귀찮아서 바다놀이를 싫어하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바닷가의 지는 서쪽 해를 얼굴에 그대로 받아들인 지한이는 다시금 구릿빛 피부색을 가지게 되었다. (바닷가에서 먹은 삼겹살 집은 백점 만점에 팔십 점!)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