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아픈 역사를 대하는 자세
「새벽의 약속」을 읽고 로맹가리라는 인물 자체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의 다른 소설들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 그의 생의 마지막 장편소설인 「노르망디의 연」을 펼쳤다. 「새벽의 약속」에서 2차 세계대전이라는 배경과 그의 독백이 워낙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서인지 「노르망디의 연」도 자연스럽게 그 연장선에서 상상하며 읽게 된다.
소설의 배경은 2차 세계대전 발발 전부터 끝날 무렵까지를 다루고 있다.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는 뢰도와 폴란드 귀족의 딸인 릴라의 사랑이 전쟁으로 어떻게 엇갈리며 성장하는지를 보여준다.
어린 시절 뢰도는 프랑스에서 휴가를 보내는 릴라를 보고 한눈에 반했고, 그때부터 그녀를 쭉 사랑했다. 폴란드가 폭격을 당한 후, 릴라의 소식은 끊겼지만 뢰도는 그녀가 살아있다고 굳게 믿으며 레지스탕스 연락책 역할로 연합군을 도우며 릴라의 행방을 계속 찾아본다. 연을 만드는 삼촌은 그런 그를 때론 우려하며, 때로는 응원하며 그를 함께 그 시대를 견딘다. 릴라는 폴란드 폭격 후 가족들을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 독일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로 넘어와서 뢰도와 조우한다.
뢰도의 삼촌은 헛간에서 연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신문에 그를 괴짜 호인이라고 기사를 실은 뒤로 유명인사가 된다. 그의 헛간은 작업실이 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연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연은 장자크 루소, 레옹 블룸 등 인물들과, 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 모를 선량한 뚱뚱이, 두근이 등도 있다. 삼촌은 본인의 명성에 대해서는 담담했고 동네의 아이들과 연을 날리는 것을 좋아했다. 전쟁 중 유대인이 많이 숨어있는 동네로 떠나 그곳의 아이들과 연을 날리다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간다.
로맹가리의 자전적 소설인 「새벽의 약속」은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같은 느낌이었지만, 「노르망디의 연」은 특별함을 느끼기 어려웠다. 가슴 아픈 부분들이 있었지만 소설 속의 사건이나 상황 때문이라기보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비극 때문이었고, 저자가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뤼도와 릴라의 사랑보다는 삼촌이 연을 날리는 장면이 더 애틋하고 슬펐다. 백과사전에서 로맹가리를 검색해보면 설명 중 말년에 평론가들에게 혹평을 많이 받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른 소설들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비슷한 느낌과 비슷한 줄거리로 진행되기 때문이지 않을까.
물론 로맹가리 본인이 유태인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터를 직접 겪고, 유태인들의 참혹함을 보고 들었던 그의 입장에서는 그 시절의 모든 순간이 가슴이 아프고, 여운이 짙을 것이다. 그가 그 시절을 이야기할 때 인물들의 모든 순간이 다 아프고, 모든 상황이 다 힘들기 때문에 그에게는 소설의 모든 부분들이 굉장히 큰 울림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창의적이고 독특하거나, 감정을 크게 건드리거나 또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 매력적이라서 그 소설 속으로 푹 빠지는 게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 소설은 적어도 나에게는 그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그 시절을 상상하는 것은 한국의 일제강점기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마음이 아프다. 소설 속 주요 인물 중에 유대인이 있거나 유대인들의 아픔이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뢰도와 삼촌, 릴라의 삶의 여정에서 유대인들의 아픔이 간접적으로나마 느껴진다. 평소에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나 영화를 피한다. 일제강점기가 배경이 되는 순간 어떤 이야기더라도 보는 내내 마음이 너무 아프다. 혹자는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아픈 역사를 다룬 영화나 책의 흥행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나 또한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 있지만 아직까지는 그 아픔을 받아들일만한 심장을 지니지는 못한 듯하다. 역사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들여다보며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 아픔을 느끼려면 나의 감정소모가 너무 크고 지쳐 무섭다. 이 부분은 아직까지 스스로가 풀지 못하는 숙제처럼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