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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일은 지났고, 아빠는 없었다

여름밤의 기억, 아빠의 팔베개

by 꼼지맘

팩을 사주는 막내의 마음

언제부터인가 막둥이가 내게 팩을 사주기 시작했다.
“엄마, 빨리 늙지 마. 팩 열심히 해.”
말은 투박했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덕분에 요즘 나는 일주일에 서너 번은 팩을 한다. 잠옷을 갈아입고 씻은 뒤 얼굴에 팩을 붙이고 있으면, 거실을 지나던 막둥이가 “잘하네, 아주 열심히 하네” 하며 흐뭇한 얼굴로 웃는다.

마침 팩이 몇 장 남지 않아, 이번 생일엔 여름에 잘 어울리는 시원한 팩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을 하다 잠들었고, 다음날 아침,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생일이… 언제였더라?”





아빠가 알려주던 내 생일

내 생일은 음력이다.
늘 헷갈렸고,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아빠가 항상 먼저 알려줬으니까.

“생일 축하한다, 네가 먹고 싶은 거 사 먹어라.”
짧은 문자와 함께 보내주시던 용돈, 그리고 따뜻한 목소리.
그 전화 한 통이 나에겐 달력보다 정확한 생일 알람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아빠가 없다.
작년 가을, 아빠가 세상을 떠났고,
이번 생일은 아빠의 전화가 없는 첫 생일이었다.




지나간 생일, 잊혀진 생일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달력을 확인했다.
왠지 모르게 불안했던 마음은 사실이었다.
내 생일은 이미 지나 있었다.
놀라운 건, 생일 날짜가 결혼기념일과 같았다는 것.

온 가족이 처음으로 챙긴 결혼 26주년 기념일.
그날은 꽃도 있었고,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그날이 내 생일이었다.

남편도 몰랐고, 나도 몰랐고,
무엇보다… 아빠가 없으니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하나를 고르라면

내 웃음소리에 남편이 잠에서 깼다.
“왜 웃어?”
“생일 지났대.”
“진짜? 결혼기념일 챙긴다고 당신 생일을 깜빡했네…”

"내생일이랑 결혼기념일중 하나만 챙긴다면 뭘 할거야?"

내가 먼저 말을 이었다.



“나는 내 생일을 챙길 거야.
내가 태어나야 당신이랑 결혼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날은 우리 엄마, 아빠에게도 축하받는 날이었잖아.”


나는 아직 '폭삭 속았수다'를 못 본다

요즘 제일 핫하다는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
넷플릭스에 있는 웬만한 드라마, 영화, 시리즈는 다 보는 나인데
이 작품만은 유독 피하고 있다.

가족들은 의아해한다.
"엄마 왜 안 봐? 이거 엄마 스타일이잖아?"

나도 안다. 분명 좋아할 내용이다.
하지만 그 드라마의 짧은 클립에서 본 금영이 아빠 ‘관식’의 모습이
너무도 아빠와 닮아 있었다.



나는 아빠의 첫딸이었다

아빠는 장손이었고, 책임감이 강했으며 다정했다.
나는 아빠의 첫딸로,
자전거에 태워 동네를 누비던 기억,
함께 간 분식집,
운동회 날 아빠 손을 꼭 잡고 들어가던 아침들.

여름방학이면 새벽에 아빠 손을 잡고 약수터에 오르기도 했다.
땀 흘리며 내려와 마시던 시원한 약수, 그 맛은 아직도 기억난다.
여름밤이면 바닷가 방파제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나는 아빠의 팔을 베고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시간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가장 안전했던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추억이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에,
그 드라마 속 아빠 캐릭터가
내게는 드라마가 아니라 기억처럼 느껴져서,
도저히 시작할 수 없었다.



아빠를 생각하며

그렇게 오늘 또,
나는 아빠 생각을 했다.

첫 생일에 전화를 걸어주던 그 목소리도 없고,
좋아할 드라마를 함께 보며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도 없다.

하지만 여전히
아빠는 내 기억 속에서,
내 생일 속에서,
내가 보고 싶지만 미뤄둔 이야기 속에서
살아 있다.

ChatGPT Image 2025년 6월 22일 오후 04_58_15.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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