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치료를 시작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버킷리스트를 만들다 말았다. 모두 만들지는 않았다. 나는 리스트를 정하기보다 꼭 이루고 싶은 목표 1~2가지를 정하는 정도로 매년 새해를 시작했다.
그래서 암을 만나고도 구입한 다이어리에 있던 버킷리스트 메모장에 2~3개를 적고 그만두었다.
그중 첫 번째가 스페인에서 한 달 살기였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 우리 가족은 2달 동안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아이들이 가고 싶다는 곳을 다녀오기로 했다. 박물관 미술관등은 가지 않고, 레고덕후 큰아이를 위해 덴마크의 레고랜드, 막둥이가 가고 싶다는 화려한 궁전(베르사유)과 몽마르트르언덕등.. 레고랜드에서는 비행기로 가면 편할걸 굳이 기차로 갔고, 숙소에서 레고랜드까지 가는 버스가 오지 않아 호텔의 가족들이 태워다 줬다. 돌아오는 버스도 마찬가지로 힘든 여정을 거쳐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레고랜드는 공항옆이라 비행기가 저렴하고 더 편안하지만 기차를 좋아하는 큰아이를 위해 기차여행을 했기 때문에 특별한 추억들이 많았다.
예술가들의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막둥이는 몽마르트르에서 눈앞에서 소매치기가 가방을 훔치는 장면을 보곤, 아빠의 배낭에 매달려서 다녀야 했다.
스위스 융프라우에서는 1년에 10번 정도의 행운의 날이라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아이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가난한 여행자들이 30만 원의 와인을 마시는 호사를 누렸다.
그 여행의 끝자락에 아이들과 약속을 했다. 우리의 다음 여행은 가우디의 작품이 있는 스페인에서 한달살이를 하자고...
내가 암을 만나고, 코로나로 나의 일들로 미루고 미루었던 스페인 한달살이가 제일 먼저 생각이 났다. 못 갈지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나의 버킷리스트에 스페인에서 한달살이와 인형 만드는 호호할머니 두 개를 적고 펜을 놓았다.
결론적으로 나는 암을 잘 치료했고, 여행을 가기 위한 목표 덕분에 체력도 컨디션도 항암부작용도 괜찮았다. 남편은 걱정을 많이 했지만 나는 우리 가족들의 여권을 갱신하고, 회복기간 중에 여행정보를 수집하며 즐거운 일상을 보냈다.
마지막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기 전 나의 주치의에게 3달 정도의 여행을 다녀와도 되는지 물어보았다. 음식관리만 잘하면 큰 문제는 없다고 했다. 그날 나는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90일간의 일정으로 4장의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내가 여행을 목표로 항암치료와 회복기에 얼마나 열심히 운동과 음식, 컨디션관리를 했는지 아는 남편은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아가씨들이 있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한 달을 살고 시차적응을 하고, 떠나기로 했다. 스페인과 그리스가 목표였다. 한 달은 스페인, 한 달은 그리스에서 지중해음식을 공부하고 접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남편은 축구를 좋아한다. 마침 바르셀로나 캄프 누에서 이강인의 경기가 있다고 했다. 우리는 무작정 경기장 표 4장을 예매했다. 그리스에서는 시골마을에서 지내고 싶다는 나를 위해 남편은 국제면허증을 발급받았다.
기차여행을 좋아하는 우리 가족은 패밀리 유레일 패스를 예매했다. 여행기간이 극 성수기이기 때문에 바르셀로나 축구경기가 있는 날의 전후로 3박 4일의 숙소도 예약을 했다.
영상공부하는 큰아이와 남편을 위해 드론도 준비했다.(남편은 드론 1급 자격증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허가를 받지 못하면 드론을 날리지 못한다.) 풍경 좋은 유럽을 드론으로 촬영해 보자고 했다. 고프로도 챙기고, 메모리카드도 넉넉하게 준비했다. 우리의 여행가방은 다양한 촬영장비들이 가득했다.
여행은 떠나기 전 준비할 때가 가장 즐겁다고 한다. 우리가 딱 그랬다. 12시간의 비행 후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아가씨의 차를 타고 저녁은 독일식재료로 만든 두부찌개를 먹었다. 새로 이사한 아가씨 집은 3층 단독주택이다. 우리의 방은 전망이 좋은 발코니가 있는 3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