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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언맨 May 13. 2016

안개에 잠긴 보성차밭

우연한 만남이 때로는 오랫동안 기억되는 순간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5월의 황금연휴 이틀째 오후, 우리는 순천만 국가정원에서 전날 보성 여행을 다녀온 지인을 만났다. 그는 전 날에는 벌교와 보성을 갔었고, 우리를 만난 날 오전에는 순천 낙안읍성에 갔다고 한다. 그러면서 보성녹차밭을 가보란다. 아내도 무척 보성에 가보고 싶다고 한다. 아내의 바람을 외면할 수만은 없어 예정에도 없던 보성을 여행하기로 한다. 아름다운 순천만 국가정원은 다시 한 번 더 와 봐야 할 명소의 목록에 올려놓고는 아쉬움을 달래며 보성으로 달린다. 내게는 보성 가는 길이 미답의 길이다. 하지만 보성녹차밭 정경을 담은 사진을 여러 번 보았던지라 새로움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은 그다지 하지 않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미세먼지로 뿌옇다. 5월의 푸른 하늘 찍힌 짙푸른 산등성이를 보고 싶었지만, 몸살처럼 성가신 미세먼로 먼 풍경은 마치 선잠을 깬 눈에 비치는 모습처럼 흐릿하다. 참 성가신 일이다.


늦게 순천만 국가정원을 출발한 대가로 보성에는 해거름 녘에 도착한다. 높은 나무 그림자가 땅에 길게 깔리고, 주위의 공기에는 서늘함이 감돈다. 녹차밭 폐장 시간까지는 삼십여 분만이 남아 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 것도 한 순간이다. 장대비처럼 곧두박질치고 있는 삼나무 울창한 숲, 안개가 자욱한 숲 사이로 난 오솔길. 이 순간 주위에 가득한 자욱한 안개는 저항할 수 없는 손짓으로 나를 잡아당긴다.


대한다원 녹차밭으로 향하는 오솔길 좌우에 쭉쭉 뻗은 삼나무가 안개 속에 도열해 있다. 당당하게 다원을 지키고 있는 울창한 삼나무 숲이 압도적이다. 안개가 불러일으키는 아득함과 신비스러움이 그 당당함에 더 힘을 실어준다. 짙은 안개가 깊은 숲 속에서 고여 물이 되어 흐르는 듯한 아주 작은 시냇물이 안개에 젖은 숲 사이를 흐른다. 짙은 안개로 숲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고, 그만큼 숲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안개가 자욱한 분위기는 미세먼지가 일으키는 성가심과는 딴 판이다.  


전혀 예상 밖의 풍경이다. 이전에 보아왔던 사진 속의 풍경을 기대하던 무의식적인 선입견과 예상은 다원의 입구에서 산산이 깨어져 버린다. 오히려 생각도 못한 기대감과 설렘으로 마음이 흔들린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길게 이어진 고랑, 정원사의 손길을 탄 정원처럼 가지런히 정돈된 푸른 녹차밭, 사진 속에서 보던 그런 녹차밭이 여전히 저 숲 너머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의 눈으로 잡지 못했던 뭔가가 더 있을 것이라는 새로운 기대가 마음속에서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숲의 요정이 이끄는 손길을 따라 나는 넋을 잃고 시커멓게 하늘을 치찌르는 삼나무 숲으로 들어선다.


습도가 높고 일교차가 큰 보성의 기후조건은 차나무를 재배하는 최적의 조건이다. 보성군은 협소한 해안지역과 보성강 유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산지로 되어 있으며 연이어져 있는 산들로 산세가 수려하고 웅장하다. 보성의 남쪽으로는 보성만이 자리 잡고 있고, 보성군의 서쪽에서 발원한 보성강은 보성군의 북쪽을 감싸 안듯이 흘러 섬진강과 합류한다. 또한 산지에서 발원한 크고 작은 천들이 이 지역을 적시며 흐른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습기가 많고 일교차가 큰 기후로 이어져 보성은 차나무가 잘 자라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게 된다.   

  

습기가 많고 일교차가 심한 기후 조건으로 보성차밭의 두 개의 얼굴을 갖게 된다. 한 낮의 얼굴과 아침저녁나절의 얼굴이 사뭇 다르다. 보성은 아침저녁나절에 안개가 자주 낀다. 이른 아침 보성은 깊은 안개 속에서 잠을 깬다. 잠 기운이 사라지면서 꿈결 같은 안개는 어둠과 함께 차츰 대기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고 차가운 기운이 감돌면 안개는 어둠과 함께 숲 속 다원으로 찾아든다.


 


안개 자욱한 삼나무 숲을 지나 드디어 녹차밭과 마주한다. 안개가 내려앉은 녹차밭은 하얀 어스름 속에,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처럼 다소곳하게 우리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 고아함은 안개 자욱한 속에서도 도저히 숨길 수가 없다. 안개 낀 다원의 풍경은 여백이 아름다운 한 폭의 산수화이다. 더구나 폐장시간이 가까운 다원은 인적조차 드물어 아주 깊은 산 속인 양 고요하고, 저 멀리 아스라이 사라져 가는 풍경은 하얀 여백이 되어 몽환적인 풍경을 이룬다.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보았다는 복숭아꽃 핀 마을인 몽유도원에 비할바는 못되겠지만 몽유 다원이라고는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한 낮의 다원은 싱그러운 푸르름을 뿜어낼 것이다. 찻잎을 따는 일꾼들이 다니는 길이 그리는 아름다운 곡선으로 뚜렷한 밭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낼 것이다. 대기 중에 가득 찬 녹차 기운은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줄 것이다. 여행으로 피로해진 발걸음은 녹차밭을 산책하는 동안 어느새 가벼워질 것이다. 아직 한 낮의 다원을 경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한 낮의 얼굴도 충분히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정작 보성의 속살은 안개 속에 잠긴 모습이 아닐까? 아무에게나 보여주지는 않는 민 낯의 보성이 바로 이 모습일 것이다. 그 날 나는 안개 자욱한 다원을 신선처럼 거닐었다. 걸음에 지친 다리는 어느새 가벼워져 있었다.  



우연한 만남은 때로는 오랫동안 기억되는 순간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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