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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언맨 Apr 17. 2017

봄은 이미 오륙도를 지나 부산항 대교를 지났다

갈맷길 3-1코스

 어김없이 봄이다


오륙도 공원 앞, 버스를 내리자마자 좀체 날리지 않는 뻣뻣한 머리칼도, 자크를 연 잠바도 사정없이 날린다. 자크를 잠그고 가슴을 활짝 편다. 온몸으로 부딪혀 오는 바람이 세차다. 잠바와 바지가 펄렁거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몸은 힘겹다. 하지만 몸을 돌릴 필요를 느낄 수는 없었다. 세찬 바람 속에 봄이 퍼득이고 있었다.  


갈맷길 3코스는 오륙도 선착장에서 영도 태종대까지 37km이다. 총 3개 구간으로 나누어진 이 길을, 오늘은 첫째 구간의 반만 걷기로 한다. 겨우내 앓았던 디스크가 완전히 낫지 않았기에 조심스럽게 걸어야 한다.


오륙도를 뒤로 하고 걷다가 자꾸 뒤 돌아본다. 이 곳에서 가장 빼어난 풍경은 오륙도이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볼 때마다 아련한 무언가를 떠올리게 되는 걸까? 제주도 산방산과 송악산 사이의 사계해안도로를 달릴 때 멀리 떠 있던 형제섬, 사스레나무가 우거진 해안길을 걸어 땅끝을 향해 걸을 때 내내 함께 했던 섬들, 거제도 홍포 전망대에서 보았던 소병대도, 거제도 금산에서 저기 멀리 보이든 섬들. 섬은 내가 소유해 보지도 않고 잃어버린 낙원인 양, 존재하지도 않는 추억을 불러 일어킨다.



오륙도! 조수에 따라 오와 육을 넘나드는 섬, 혹자는 밀물이 들면 섬이 하나 잠기고, 썰물이면 섬이 하나 드러나서 다섯이 되었다 여섯이 되었다 하는 건 아닐까 하고 나름 논리적으로 추론을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그 반대다. 물이 들면 여섯, 물이 빠지면 다섯이 된다. 육지에 가장 가까운 섬 우삭도는 물이 들면 방패섬과 솔섬 두 개의 섬이 된다. 그리고 차례로 수리를 닮았다고 수리섬, 송곳처럼 생겼다고 송곳섬, 큰 굴이 있어서 굴섬, 등대가 자리 잡고 있는 등대섬. 오륙도를 이루는 섬들이다.  


오륙도의 풍광을 뒤로하고 다시 앞으로 걷는다. 백운포 해군기지가 눈 앞에 있다. 미 해군의 항공모함 칼빈슨호가 정박해 있다. 그 위로는 신선대로 가는 길이 휘감아 돌고 있다. 내가 걸을 길이다. 저 길 아래 위로는 천주교 묘지.



오륙도가 멀어지면서 세찬 바람도 잦아들었다. 바람이 잦아든 것인지, 아니면 바람이 SK아파트 단지에 막힌 것인지, 아무튼 잔잔한 대기 속에 봄은 더욱 짙어진다. 오늘의 걸음은 봄맞이 산책이 된다. 길가의 나무와 꽃, 풀들이 봄바람이 흔드는 바람에 웅성 웅성 깨어나고 있다. 벚나무 꽃 몽우리는 가지 위에 머리를 불쑥 내밀고 있다. 톡 터질 듯한 몽우리들이 아우성이다.  



또 한쪽에서는 이미 꽃이 핀 개나리다. 어릴 때는 봄의 색깔이 노란색인 줄 알았다. 봄의 다채로운 색상을 깨닫기에는 한 참 어린 나이여서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면 살던 주위에는 개나리가 그렇게 많았나 보다. 그저 봄이면 세상이 노란 개나리로 가득했다는 아련한 기억이 남아 있다. 그때는 벚꽃도 몰랐고 진달래는 이름으로만 알았던 때였다.



머리가 커지고 까까머리를 한 나이가 되자, 봄도 달라졌다. 아니 봄은 여전했지만 나에겐 더 이상 이전의 봄이 아니었다. 환하게 눈에 들어오는 개나리의 노랑은 여전했지만 봄은 또 다른 색으로 다가왔다. 잎, 잎새, 잎사귀, 이파리, 아니 싹이라고 해야 하나. 마른 가지에서 움트는 그 색. 초록도 아니요, 그렇다고 연두라고 하기에도 마음이 가지 않는 그것, 난 아직도 그것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안을 수도 없고 꼬집을 수도 없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게 하는 그것, 그냥 그대로 있어 주었으면 하는 안타까움, 새끼들의 연한 순수함이랄까, 난 아직도 그것을 사랑한다.      

완성을 향한 미완성 그 자체로 아름다운 미완성 - 봄이다

해마다 봄은 어김없이 오지만, 봄을 대하는 마음은 한결같지 않다. 봄은 해마다 다른 모습으로 온다. 사월의 캠퍼스에 하얀 벚꽃이 가득 날리던 그 해 봄은 어린 시절의 노란 봄이나 까까머리 시절의 푸른 봄과는 달랐다. '꽃잎이 바람에 날린다'는 말이 그저 아름다운 시적 표현이라고 생각을 했었던 나로서 그 봄은 새로운 발견의 봄이었다. 사월의 캠퍼스에 산산이 부서져 흩날리던 벚꽃 풍경, 그때의 놀라움이란, 눈이 내리는 것을 처음 본 흑인의 눈에 어린 경탄이었을 것이다.   


또 봄이다. 지천명을 지나고부터는 해마다 봄이 짙어지고 있다. 이제 몇 번의 봄이 남았을까 하는 산술적 계산 탓일지도 모른다. 직감적으로 그걸 느끼는 것일 게다. 지이드는 [지상의 양식]에서 살아있을 동안 삶에 탐닉하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의 온 감각을 다 이용하여 자연을 온전히 느끼고 즐기도록, 그러한 욕망을 억제하지 말고 그것에 탐닉하도록 소리쳤다. 프랑스의 소설가 장 그르니에는 자신의 에세이집 [섬]에서 무無를 이야기한다. 무에 이르는 죽음, 인도의 정신이 추구하고 있는 영원한 죽음,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난 완전한 무를 말하고 있다. 이런 완전한 무나 죽음을 논하는 것은 오히려 그 반동으로 삶으로 열렬히 몰두하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카뮈는 그렇게 느꼈고 그렇게 이야기했다. 삶을 즐기라는 한마디 말도 없음에도, 오히려 지이드의 강렬한 외침보다 더 깊이 울리는 소리가 저 조용한 침묵 속에서 들려온다고 이야기한다.


삶의 즐거움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자연 속에 있다. 작은 것 속에 있다. 우리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작은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삶의 다른 즐거움 속으로 빠져든다. 들풀의 세계가 그중 하나 이리라. 수십 번의 봄을 겪었지만 이제껏 한 번도 알지 못했던 봄의 세계가 지면 위 몇 센티미터 위에 펼쳐져 있다. 해마다 봄이면 피고 졌을 그 수많은 들풀들. 눈이 어두워져 가는 나이에 알게 된다. 가꾸지 않은 작은 화단에, 뿌리지 않고 심지 않은 들풀들이 꽃밭을 이루고 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꽃밭은 눈에 보이는 꽃만큼 아름답다. 별꽃, 광대나물, 유럽점나도나물, 큰봄까지꽃. 들풀들이 봄 들판을 장악한다.



걸었던 길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면 또 하나의 여행이 시작된다. 걸을 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런저런 생각들을 풀어놓으며, 그 길을 다시 한번 걷는다. 그 길은 이미 걸었던 길 위에 있겠지만 정확히 똑같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 자신 속으로의 여행이다. 난 글을 쓸 때마다 또 다른 여행을 하는 것이다.  


신선대를 지나면 남쪽으로 부산항이 멀리 보인다. 이 길 아래 숲 너머로 신선대 부두, 그리고 그 너머로 부산항을 가로지르는 부산항 대교. 쪼그리고 앉아 길섶에 난 들풀들에도 눈길을 주어가며 내리막 길을 걸어 동명대학 쪽으로 내려왔다.  


평화공원을 앞두고 이만 걸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걷는 길은 당분간 도심을 통과하는 길이다. 대연수목원, 평화공원, UN묘지공원, 부산박물관을 거쳐 시내를 통과하는 길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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