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맷길 2-2코스, 이기대 해안길
지난가을 이기대를 걸었다. 그때가 몇 월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바닷바람에 흔들리던 무성한 쑥부쟁이가 생각나는 것을 보면 늦가을이지 싶다. 유달리 쑥부쟁이를 기억하는 건 그 쑥부쟁이가 장산에서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잊게 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산 억새밭에 갔다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간 적이 있었다. 장산마을 가는 길이었다. 이 길은 산 아래에서 장산 마을을 거쳐 정상에 있는 군부대로 이어진 길이었다. 이 길은 낡고 오래된 아스팔트 길이었다. 하지만 아주 완만히 이어진 길 가 수풀에는 가을의 정취가 가득했다. 들국화가 여기저기 피어있는 길은 마치 시골 들판 사이로 난 길과 같았다. 무리 지어 깔깔거리고 있는 쑥부쟁이, 수줍게 홀로 피어 있는 구절초. 이 길을 걷기로 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이 길에는 난 장산의 다른 얼굴을 보았고, 예기치 않은 즐거움을 만끽했었다.
그 후 일주일쯤 뒤, 다시 장산을 오르는 발걸음에는 설레임이 앞섰다. 그런데 그 길로 들어섰을 때, 난 예상치 못한 처참함에 깜짝 놀랐다. 수풀과 들국화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수풀은 군인들의 짧은 머리처럼 모조리 베어져 밑바닥 흙이 드러나 보였고, 그 길에는 살육의 냄새가 비릿하게 코 속으로 파고들었다. 저기 햇살 드는 곳에서 꽁지머리를 묶은 가시내들이 허리를 잡고 깔깔거리듯 웃고 있던 쑥부쟁이도 없었고, 응달진 곳 수풀 속에 숨어 수줍은 듯이 미소 짓는 구절초도 없었다. 전시 행정적인 이러한 도발에 무척 골이 났다. 아쉬웠다.
이기대 길에서 만난 쑥부쟁이들은 다시 가을의 정취를 되살려 주었다. 지난가을의 들국화는 유달리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동생말에서 이기대 해안길로 들어서자마자 야생화 동호회 사람인 듯한 분들이 한쪽 벽에 야생화 사진을 가득 걸어 놓고 트레커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잠깐 야생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쑥부쟁이와 해국의 차이점에 대해 들었다. 둘 다 국화 종류라 구별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해국은 잎사귀가 두툼하다고 한다.
이기대 출렁다리를 지나 어울마당으로 가는 도중에 해녀막사가 있다. 해녀 하면 제주도인데, 부산에도 해녀가 있다. 이들은 제주도에 살던 해녀들이었는데, 부산으로 시집을 온 분들이라 한다. 섬을 떠나 뭍으로 와서도 물질을 놓을 수 없는 것은 그들 피에 흐르는 본능 때문일 것이다. 전에는 해녀들이 막 채취한 해산물을 다듬어 이 곳에서 팔았었는데, 아마도 시에서 공원 내 상행위를 금지시키는 바람에 더 이상 그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해녀막사를 지나 어울마당으로 가는 길가에 활짝 핀 쑥부쟁이 무리가 가을을 수놓고 있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는 생긴 것은 비슷한데 식생이 꽤 다른 것 같다. 쑥부쟁이는 따가운 가을 햇살을 좋아하는 듯하고, 구절초는 부끄러운 새색시처럼 응달에 홀로 피어난다.
동생말에서 이기대 어울마당까지의 길은 가파른 부분이 없이 평화롭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곳곳에 해식 지형을 관찰할 수 있는 곳도 있다. 해안 자갈길이나 해안 바위 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수억 년 동안 형성된 돌개구멍이나 해식 동굴을 볼 수 있는 곳도 있다. 한 때는 돌개구멍이 공룡발자국인 걸로 잘못 알려진 때가 있었다.
이기대 어울마당에는 넓은 광장이 있어 부산 불꽃 축제 때 많은 사람이 여기서 불꽃을 관람하기도 한다. 동생말에서 어울마당까지의 길은 완만하여 쉽게 걸을 수 있는 구간이다. 동생말에서 어울마당으로 걸어도 좋고, 어울마당에서 동생말까지 걸어도 좋다. 즐기듯 걸으면 30~40분 정도 걸리려나 모르겠다. 주말에는 동생말에서 어울마당을 거쳐 오륙도 공원까지 마을버스가 운행된다. 물론 배차 간격이 20~30분 정도 되기는 하지만 이기대 해안길을 걷고 마을버스로 원점 회귀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
어울마당을 출발해서 치마바위, 농바위를 지나 오륙도 공원으로 가는 길은 어울마당까지의 길과는 달리 조금 험하다. 등산을 자주 하시는 분들에게야 험하달 순 없겠지만, 그래도 평소 운동 부족인 분들에게는 꽤 허덕이게 하는 코스이다. 만약 오륙도 공원에서 어울마당 쪽으로 넘어온다면 조금 수월할 수도 있겠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여러 번 교차하는 이 길은 해안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숲 속으로 난 길이다. 관광버스들은 오륙도 공원에 관광객들을 풀어놓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기대 해안길을 종주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오륙도를 구경하고 스카이워크를 걷는 것으로 만족한다. 하지만 걷기를 좋아하는 분들은 약 2~3시간 정도 되는 이 길을 꼭 걸어 보면 좋을 것이다. 한국의 해안 둘레길 중 이기대길이 으뜸이라 할 만하기 때문이다.
농바위 전망대에서 목에까지 올라온 숨을 돌리려 잠깐 쉬어간다.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포개져 있는 농바위, 내 눈에는 한 아낙네가 등에 아이를 업고 머리에 뭔가를 진 모습처럼 보인다. 농바위 뒤로는 동해와 남해를 가르는 기준이 되다고 하는 오륙도가 보인다.
스쳐가는 많은 사람 중 한 아가씨가 친구에게 말하는 소리가 엉겁결에 들린다. "여기는 손대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겨놓았네."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 가파른 곳에 데크길을 만든 것 외에는 손을 대지 않은 이 이기대 해안길은 부산이 내세울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사람의 손 때가 묻지 않은 이 지역은 반딧불이를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청정지역이기도 하다.
동생말에서 오륙도 공원으로 가는 사람들과 반대로 오륙도 공원에서 동생말을 향해 가는 사람들은 이기대 해안길 어디서 쯤에선가 한 번은 만나게 된다. 서로 마주치는 사람들은 순간적인 교차로 그만이지만, 같은 방향을 향하는 사람들은 아예 한 번도 만나지 못하든지, 아니면 서로 만났다 헤어졌다 하면서 아주 짧은 동행이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다가도 서너 번 만나 얼굴을 익히면, 땀을 식히며 잠깐 쉴 때에는 가벼운 대화가 오가기도 한다. 자연과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사람을 만나는 것도 여행의 의미를 더해주기도 할 것이다.
깔딱 고개를 힘들게 넘어서자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 위에 오륙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스카이워크, 오륙도 공원. 산 정성에 올라 느끼는 희열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희열일까?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극복해 내었다는 희열일까? 아니면 높은 곳에서 아래를 조망하는 데서 오는 희열일까? 난 산을 좋아하거나 그렇게 많이 오른 것은 아니지만, 이 깔딱 고개를 넘는 순간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희열로 뿜어져 나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기대 해안길에서 가을의 공기를 한껏 마셨다가 뱉어내는 이 호흡에는 분명 바다 소금내와 가을 들국화의 향내가 섞여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