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암시를 교묘한 완곡법으로 가장하는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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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이웃에 사는 스완은 자주 마르셀의 집에 방문하였다. 스완이 저녁 식사를 하러 오기로 한 전날, 그는 마르셀의 할머니 동생 분들에게 아스티산 백포도주 한 상자를 보내 주었다. 그런데 이 할머니의 여동생들은 속된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 나머지, 개인적인 암시를 교묘한 완곡법으로 가장하는 기술이 너무도 뛰어나, 상대방조차도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었다. 스완이 저녁 식사를 위해 오기 전에 할아버지는 두 처제에게 "포도주에 대해 알아들을 수 있게 감사 인사를 하는 걸 잊지 말아요. 포도주 맛도 좋고, 포도주 상자도 아주 컸으니까."하고 말했다. 스완씨가 저녁 식사에 자리에 있을 때, 두 처제 중 동생 플로라가 그 마을에 있는 뱅퇴유씨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이웃에 대해 "그분이 뱅퇴유 씨 이웃이라는데 전 그 사실을 전혀 몰랐지 뭐예요. 아주 친절한 분이던데." 하고 말했다. 그러자 두 처제 중 언니인 셀린 할머니가 "이웃에 친절한 사람이 사는 게 뱅퇴유 씨뿐인가 뭐."하고 말했다. 플로라 할머니는 이 말이 스완이 선물한 아스티산 포도주에 대한 셀린 언니의 인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축하와 야유가 섞인 표정으로 스완을 쳐다 보았다.
"이웃에 친절한 사람이 사는 게 뱅퇴유 씨뿐인가 뭐."하는 말이 스완이 선물한 아스티산 포도주에 대한 셀린 언니의 인사였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개인적인 암시를 교묘한 완곡법으로 가장하는 기술이 너무도 뛰어나, 상대방조차도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었다.'라는 표현의 적절한 예시로 사용되었다.
프루스트의 표현법이 바로 이와 같다. '개인적인 암시를 교묘한 완곡법으로 가장하는 기술이 너무도 뛰어나, 독자들이 좀체 델리킷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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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완이 집으로 돌아 간 후,
"아, 참, 두 분께서는 아스티산 포도주에 대한 감사 인사를 못 하셨구먼." 할아버지가 두 처제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말씀하셨다. "뭐라고요? 우리가 안 했다고요? 우리끼리 얘기지만, 저는 그 말을 아주 정교하게 돌려서 했답니다."하고 플로라 할머니가 대답했다. "음, 그래, 아주 잘했어. 내가 다 감탄했단다."하고 셀린 할머니가 말했다. "언니도 아주 잘했어요." "음, 친절한 이웃이라는 말은 내가 생각해도 자랑스러웠어." "뭐라고? 그 말이 감사 인사라고!"하고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그 말은 분명히 나도 들었지만 스완에게 하는 말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걸, 장담하지만 스완도 틀림없이 알아듣지 못했을걸." "그럴리가요. 스완은 바보가 아니예요. 스완은 그걸 음미했을거예요. 술이 몇 병이고 가격이 얼마고 하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잖아요."
옆에서 직접 대화를 듣고 있던 당사자들도 미묘하게 완곡한 그 표현을 알아듣지 못했는데, 당사자가 아닌 독자들이 그 뜻을 알아차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런지 프루스트는 두 세번이나 그것이 할머니의 감사 인사였다고 알려주는 대화를 삽입한 듯하다. 플로라 할머니 뿐 아니라 셀린 할머니도 순간의 기회를 포착하여 분별하기 어려운 표현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더랬다.
스완이 할아버지에게 말하는 도중 " .... '이 두꺼운 병 속에서 내가 본 것이라고는 불쾌함과 저속함과 어리석음뿐이었노라'라고 말입니다." 이라고 말했을 때, 셀린 할머니는 이 순간을 낚아 채어서 "두꺼운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완전히 다른 것이 담겨 있는 병들도 아는데요."라고 힘차게 말했다. 아스티산 포도주 선물이 그들 두 자매게게 보내 온 것이었기 때문에 , 그녀 역시 스완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 두꺼운 병 속에'라는 말은 '조잡한 음모'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직역 표현이다. 아마도 스완은 "이 조잡한 음모 속에서 내가 본 것이라고는 불쾌함과 저속함과 어리석음뿐이었노라'라고 말입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셀린 할머니는 '이 조잡한 음모'라는 본 뜻은 흘려 버리고 '이 두꺼운 병'이라는 거친 직역적 표현을 낚아챌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아마도 두 할머니의 "개인적 암시를 교묘한 완곡법으로 가장하는 기술" 프루스트 표현의 한 갈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만큼 독자들의 노력이 더해질 때 프루스트는 더 빛나는 존재가 되지 않을까? 프루스트의 대작을 한번 읽기도 어렵겠지만, 아마도 대담한 독자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두 번째 읽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면 깊은 심연에 감추어졌던 프루스트의 반짝거리는, 때로는 번득이는 보석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