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만남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조우는 추억되지는 않겠지만 잊히지도 않을 것 같다.
그녀를 스쳐 지나간 곳은 오륙도 가는 길과 백운포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이었다. 신선대를 향해 걷던 나는 분홍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서 있던 건널목에서 그녀의 등 뒤로 지나쳤다.
길을 건너려는 듯 횡단보도를 향해 서 있던 그녀는 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아마 지도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단발, 짙은 검정 머리칼, 귀가로 거의 수직을 이루며 떨어진 머리칼의 끝 라인은 예리한 예각을 이루며 그녀의 목 뒤를 두르고 있었다.
백팩만 메면 무의식의 표면에서 의식의 영역으로 꿈틀거리는 오지랖, 뭔가 가이드 처럼 몇 마디 말이라도 건네고 이야기해 주고 싶은 오지랖이 실천의 영역에서 발현하기 전에 난 그녀의 뒤를 지나치고 있었다.
그녀를 지나 길을 걸으며 난 길가에 핀 들꽃은 참 슬픈 존재라고 생각한다. 인적이 드문 이 길가에 핀 이 꽃들은 인간의 관심 영역 밖에 있는 존재라고,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하는, 아무도 봐주지 않는 이 꽃들의 슬픔. 하지만 틀렸다. 애초에 들꽃은 인간이란 아랑곳하지 않는 존재인 것을. 우리 인간은 너무 자기 본위적인 것 같다. 인간이 봐주지 않는 들꽃이 오히려 더 자유롭지 않을까.
길에서 만난 꽃과 나무의 이름을 불러준다. 수국, 치자나무, 가우라, 오리나무, 꽃댕강나무, 강아지풀, 개망초, 등등. 꽃은 이미 졌고 단풍은 아직이다. 나는 꽃을 닮은 내가 아는 여인들을 생각한다. 목련, 수선화, 매화, 가우라, 쑥부쟁이, 모란, 국화, 칸나, 튤립, 진달래, 민들레...
저마다의 닮은 색깔과 모양과 향기가 있다.
길을 걸으며 불현듯 일어나는 생각의 조각들을 잡고 메모하느라 잠깐잠깐 멈추는 동안 분홍빛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십여 미터 뒤쪽에서 여유롭게 이 길을 걸어오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신선대까지의 이 인적 드문 길 위엔 그녀도 함께 걷고 있었던 것이다.
신선대 앞 무제등 소공원, 팔각정에 올라앉아 쉬어간다. 단 하나 준비해 간 사과를 베어 물어 먹는 사이 그녀가 팔각정 옆을 지나쳐 간다.
이제 그녀가 앞섰다. 내가 그녀의 뒤를 걷는다. 그녀는 아주 여유롭다. 뒤에서 걷고 있는 나를 의식하는 건지, 아예 의식하지 않는 건지. 난 계속 그려 뒤를 걷는 것이 불편하다. 나는 그녀를 지나치지 않을 수 없었다. 난 고민에 빠졌다. 인사라도 건네야 할까? 산행이나 여행 중 길 위에서 만난 이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그냥 말없이 지나치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인사만 건네는 것도 뭔가 자연스럽지 않아 보였다. 몇 마디 말이라도 더 건네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어디서 왔느냐, 이 길은 걷기에 어떤가, 등등.
하지만 말을 건넨 후 어느 정도 이야기를 지속할 것인지, 헤어질 타이밍을 잡는 것도, 무슨 말로 끝내야 할 지도, 모두 나에겐 결정 자체는 물론 그런 상황도 어려워 보였다. 마침내 어색하기는 하지만 그냥 지나치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순간의 어색함을 보상해 주는 긴 편안함을 선택한 것이다.
말없이 어색하게 그녀를 지나쳤다. 지나친 후에는 편할 줄 알았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뒤에 그녀를 두고 걷는 것이 편안하지 않았다. 그것은 순수한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었다. 사진을 찍거나 메모를 위해 편하게 멈춰 설 수 없었다. 그녀가 접근해 오는 것도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나를 지나쳐 가게 할 순 없었다. 또 한 번의 지나침이 가져올 어색함, 그리고 또다시 나는 그녀의 뒤를 걸으며 지나쳐야 할지 걸음을 늦추어야 할지 고민에 빠지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에게도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의식하면서 걸음을 늦추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지나칠까 말까, 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을 그녀에게 안겨 주고 싶지도 않았다. 아마 모르건대 그녀도 나를 뒤에 두고서 내가 어떻게 할지, 또는 앞에 두고서 그녀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많지 않았을까?
호젓한 길 위에 던져진 두 돌은 각자의 물결을 만들며 서로의 간섭무늬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혼자 걸었다면 평범했을 물결이었을 텐데. 난 이 길의 기억이 오래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에게도 이 길은 기억되지도 않겠지만 쉽게 잊히지도 않을 것 같다.
보행자 신호등 파란불이 깜박일 때 뛰었다. 등에서 좌우는 흔들리는 백팩을 잡고 뛰어 건넜다. 이로써 그녀와의 동행과 어새함을 자아내는 걸음은 끝났다. 아니 끝냈다.
인적이 드문 길이 끝나고 보행자가 많아진 길로 들어섰다. 동명대 앞에서 뒤에 오는 그녀를 놓쳤다. 뒤를 보니 그녀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의 존재가 그녀로 하여금 인적 드문 낯선 길을 걷도록 했다면, 그리고 조금이라도 안전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면. 부산의 신선대길이 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 길이 되었길 바라며 나는 나의 길을 계속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