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재호는 정만의 탁자 위 사진을 보며 호기로이 묻는다.
“저분은 누구신가요?”
정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대답하기 싫다. 뭔가 말을 해주고 싶지만 등이 아리다. 수술로 철심을 박아 놓은 등이다. 눈이 호기심으로 가득한 재호를 뒤로 하고 그는 아파트 단지 지상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운다. 어두운 세상에 흰 연기가 피어오른다. 정만은 계속 기침한다.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는다.
언젠가는 필히 재호에게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준비되지 않았고, 뒤틀린 기억 속에 살 뿐이다.
*(1980)
날이 맑다. 저녁이 가까워 온다. 동네에서 꽤 이름난 미용사 김진명은 그의 어머니를 도와 빨래를 하고 있다.
삐그덕거리는 집 대문을 열고 김진수가 들어온다. 그의 손에는 종이 박스 하나와 청테이프가 들려 있다. 진수는 피곤한 눈으로 박스를 내려놓는다.
“나 왔어.”
“박스는 뭐냐.”
“학교 과제하려고. 자료 가져온거야.”
“그렇게 많다고?”
“신경 꺼.”
진명은 진수가 잠든 틈에 박스를 열어볼까 하여 거실로 걸어간다. 청테이프로 단단히 막아 놓은 채다. 진명은 칼로 테이프를 끊는다. 안에 가득히 들은 유인물을 꺼낸다.
‘군부 독재는 물러가라’
진명의 눈가가 떨린다.
“야 김진수 너 이리 나와!” 종이 전체를 꼼꼼히 읽은 후 그가 소리친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너 돌았냐?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런 걸 만들어!”
“문제 있어? 그냥 종이일 뿐이야.”
“전화도 끊긴 마당에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인마.” 진명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한다.
“형 나는, 그게 맞다고 생각해. 아니, 그렇게 믿어.” 진수는 진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야.”
“그걸 왜 네가 하냐고, 우리 아버지도 그리 하셨다가 간첩 빨갱이로 몰려서 총살당하신 걸 벌써 잊었어!”
아버지는 이십여년 전 군중의 앞에 섰다가 총을 맞았다. 그 후 행방이 묘연하다는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겠지만, 나는 아니야.”
“미친 새끼. 너마저 집안을 풍비박산 낼 샘이냐? 무슨 데모고 무슨 총이며 무슨 운동이야. 나는 그런 사람들이 제일 싫어. 온갖 고상한 척 다 하면서 집안은 신경 쓰지 않는 거. 진수야, 김진수! 내 말 알겠냐고.”
진명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다. 진수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그저 뒤로 돈다.
“나는 변할 생각 없어. 형은 살아.”
“김진수! 내 말 안들어!”
“나라가 잘못하면 국민이 바꿔야지. 빨갱이니 간첩이니 하는 거, 다 수작이야.”
“나라고 모를 줄 알아?”
진수는 더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그 역시 무언가 참는 것이 분명하다. 다음날 아침에 김진수는 적십자병원을 잠시 들렀다가 삼십분쯤 뒤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뒤에 도청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뉴스가 라디오로 퍼졌다. 삼백명 정도의 폭도 중 서른 정도를 사살했다고 한다.
‘우리 군은 어젯밤 폭도를…영광의 승리…이제 평화의 시기가….’ 진명의 숨이 잠시 멈춘다. 이를 들들 간다.
김진명은 불안해하는 어머니를 어떻게든 안심시킨다. 그 역시 불안한 마음은 떨칠 수가 없다. 김진수는 정확히 집을 나간 며칠 뒤, 시끄러웠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아 전화망이 복구된 후에 부고가 들려왔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