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할(3)

by 김문수

*(2010s)
아버지, 평안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매일 밤 웅크리고 주무시던 아버지가 잊히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유일한 손글씨를 보았습니다. 돌아가신 진수 삼촌께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자랑스러운 동생에게’라는 구절로 시작하던 이야기입니다. 이후에는 아무 말 없이 종이 한 켠에 9.9 할이라 불안한 글씨체로 쓰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제 아버지를 뵐 수 있는 건 어느 무덤가 뿐입니다. 나머지 할을 제가 채워야 함을 압니다. 때로는 0.2 할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진수 삼촌의 이야기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물어볼 때마다 아버지의 얼굴은 상했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과거를 진 어깨는 너무나 무갑습니다. 아버지. 읽어 주시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저 방구석의 레코드 판을 종종 돌려 보고는 합니다. 음질이 나쁘고 자주 끊깁니다. 진수 삼촌이 부르짖었을 노래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겨우 이제 대학에 간 저는 염려치 마세요. 아버지, 언젠가는 뵙시다.

영진은 연필을 꽉 쥔다. 얇은 팔에 핏줄이 돋는다. 도대체 무슨 때였을까. 영진이 경험해보지 못했고, 경험할 수 없는 일일 것이리라. 흑심이 부러진다. 그대로 내비둔다. 마지막 일을 한다. 책을 피고 또 덮는다. 발을 까닥이면서. 위아래로. 질서 없이, 달달 떨면서.

그에게 그란 하나의 깨달음이었을까. 소멸에 그치진 않았을 테다. 아직도 돌아가는 오래된 음악 재생기만 봐도 짐작이 간다. 아버지의 유품이다.

*(1994)
탁, 하고 투명한 소줏잔을 내려놓는다. 한겨울이라 춥다. 입김을 후후 분다. 또 한 잔 들이킨다. 초록 병은 이미 몇 개 쌓였다. 라디오에서는 세상이 변했다며 호들갑을 떤다. 그 어디에도 진수는 없다. 진명도 없다. 조용히 술을 삼킨다. 키우기 싫다. 말하기 두렵다. 숨기기에도 싫다. 씨팔. 식당 주인이 정만을 걱정스레 바라본다. 그는 눈물을 훔치며 주머니에서 꾸깃한 돈을 꺼내 계산한다. 구름이 없어서 그런지 달이 하얗게 빛난다.

*(1980)
“김진수입니다.”
“누구라고?”
“김진수요.”
“학생이 참 당차네. 그래도 그냥 집으로 가라.”
“싫습니다. 나더러 아무것도 하지 않고 떨기만 하라는 겁니까?”
“여기 있다간 너나 나나 다 죽는 거야.”
“압니다. 너무나 잘 압니다. 그치만요 아저씨, 이제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결국 죽는 건 만사형통 아니겠습니까?”
“…….”
“저는 이곳을 사수하겠습니다. 아저씨와 함께 말입니다.”

올해로 마흔둘이라는 아저씨는 안면 전체가 땀으로 범벅인 채 벽에 붙어있다. 창가에 서 있다가는 총 한발 못 쏘고 쓰러질 것임이다.

*(2023)
그때 왜 총을 못 쏜거냐고. 우리는 총이 있었잖아. 진수야. 겨우 구식 카빈이긴 했지만 있었잖아.

정만은 기억한다. 옆자리 친구가 피를 흘리며 운명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은 살아서 감옥에 보내졌다가 이후 특사로 풀렸다.

총. 총. 총.

짧은 소리들로라도 끝까지 총을 잡던 진수였다.
정만은 황망히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진명이 형이 죽은 지 삼개월이다. 가끔 영진을 보러 간다. 차마 입을 떼지는 못한다. 진명이 형도 그랬다. 상처에 떨군 소독약 같은 기억이다. 소독약은 말랐는데 딱지는 지질 않는다. 그렇다고 더 바를 것도 없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