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
만개한 추억이 어떨지 모르겠다. 정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잔뜩 움추리고 걷는다. 비틀거리면서 겨우 자세를 유지한다.
“빨리 앞으로 가!”
군홧발이 그의 옆구리를 친다. 정만은 힘없이 그의 말을 듣는다. 잔상이 잊히지 않는다. 자신들을 만류했던 학생부장 이 선생이 옳았나 싶다. 뜨거운 열기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낡은 러닝셔츠 한 장만 입은 채로 먹고, 자고, 맞아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끔씩은 그날 도청에 있던 걸 후회한다. 너무 많은 것들을 봤다. 아름다운 도시였던 이곳이 어쩌다 이리 변모하였는지 알 길이 없다. 칠흑같은 바탕에 죽죽 그어진 붉은 물감 외에는 본 바도 없다.
겨울이 왔다. 십이월의 눈을 언뜻 본다. 손은 뼈마디가 드러나고 몸은 수척하다. 곳곳에 퍼런 멍이 가득하다. 툭하면 픽 하고 쓰러질 듯하다.
사일 후 헌병 완장을 찬 군인이 정만의 앞에 서서 묵직하게 말한다.
“유정만, 특별사면이다. 빨리 나가. 이 쓸모없는 폭도 새끼.”
정만은 벽을 짚고 일어난다. 헌병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간다. 한겨울 공기가 온몸을 할퀸다. 모든 것을 잊고 싶다.
잔향은 남아 코끝을 간지럽힌다.
*(2017)
탁탁탁
“유정만 씨?”
“아 네.”
“그래서 어떻게 된거죠?”
정만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여기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사람들이 툭툭 쓰러진다고요. 영화에서 본 거랑은 달라…. 당신이 상상치도 못할 광경입니다.”
“한 가지 더 묻고 싶습니다.”
“뭐든지……힘들긴 합니다. 아들에게도 해주지 못한 이야기라서.”
“소견서를 보니 등에 철심을 몇 개 박으신거같은데, 맞나요?”
“네.”
“혹시 이유를…….”
“맞았어요. 숨 쉰다고, 눈 깜빡였다고, 손가락 하나 움찔했다고……그것 말고도 별의별 이유로 우리는 맞았습니다. 감옥 안에서는 서로 딱 붙어서 덜덜 떨며 정자세로 앉아있는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기자는 고개를 저으며 질문을 이어나간다.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요?”
진명이 떠오르고 진수를 지켜주지 못한 것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그 자리에서 같이 죽었더라면 오늘날에 함께 묻혀 손잡고 누워 있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럼에도 정만은 오로지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말만을 남기고 인터뷰를 마친다. 뉘엿뉘엿 지는 붉은 태양이 그의 양눈에 선히 들어온다. 미간을 찌푸린다.
빵빵거리는 자동차 경적음이라던가 왁자지껄한 학생들의 웃음소리들이 귀에 엥엥 들러붙어 고개가 약간 무겁다.
재호를 봐야지, 이제.
딱 하나, 내 아들, 내 아내, 내...... 친구.
집이 들어서니 보이는 것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어스름과, 예능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는 텔레비전, 그리고
진수의 깊은 눈. 몇 할 채우기 위해 남았던 그.
10할, 열 할, 구 할, 아직은 다 차지는 않은.